어느푸른저녁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시월의숲 2020. 6. 1. 00:03

이제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하긴 벌써 5월의 마지막 날이고 곧 있으면 6월의 첫 날이 된다. 지금은 장미의 계절이지만, 장미보다 더 많이, 더 쉽게 보이는 것이 금계국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나가면 길 가에 온통 노란 금계국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코스모스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꽃은 올해 유난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띄는 그 꽃을 볼 때마다 누군가 작정이라도 한듯 도로마다 한 움큼씩 씨를 흩뿌려 놓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회룡포 마을로 가는 길에 본 노란 금계국이 장관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던 노란 빛의 파도. 

 

원래 어제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으나 받지 못했다. 평소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아서 종종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제는 토요일이었고, 혹시나 몰라 소리를 켜두었는데도, 받지 못했다. 늦게 전화를 하니, 같이 용궁으로 저녁 먹으로 가자고 말할 참이었다고 했다. 나는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 저녁에 가자고 말했으나, 아버지는 내일 일요일이까 그냥 집에서 쉬라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회룡포 마을에 양귀비꽃을 잔뜩 심어놓았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래서 오늘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용궁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고, 그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우연의 일치였던가? 회룡포는 용궁면에 있는 곳이었고, 아버지는 그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던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와 함께 오랜만에 회룡포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양귀비꽃이 가득 심겨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양귀비꽃은 내성천이 휘돌아 나가는 회룡포의 중심 마을 안에 있었다. 붉은(붉다고만 표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양귀비꽃을 실제로 보니 조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투명한 천에 연하게 탄 붉은 물감을 툭 떨어뜨려 자연스럽게 번지게 한 느낌이랄까. 양귀비의 꽃잎은 그 겹침의 모양도 여느 꽃과 다른 것 같았고, 색깔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붉음' 같았다. 청초하지만 은근히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어서 오는 길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회룡포 마을로 들어오는 곳에 설치된 뿅뿅다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어른들은 모래사장에 앉아 아이들이 물놀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이 휘돌아 나가는 산 아래 그늘은 깊고 그윽한 느낌을 주었고, 발 아래 모래는 부드러웠으며,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나와 아버지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시 돌아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늦은 오후였지만, 해가 길어서 무척이나 환했다. 양귀비 꽃은 보기만 해도 취하는 것인지, 나는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 길로 아버지와 나는 용궁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렇게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애가 어째 오늘 나오자고 했냐? 내가 어제 전화해서 그런 거냐?" 내가 대답했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지척에 꽃을 많이 심어 놓았다고 하니 어찌 오지 않을 수 있나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꽃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