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시월의숲 2020. 11. 23. 23:21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로는 여성의 진정한 본성과, 픽션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크나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문제의 결론에 도달해야 할 의무를 회피했고 따라서 나에게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방과 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최선을 다해 보여주겠습니다.('자기만의 방',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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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영감이 풍부한 말들, 심오한 생각들이 그녀의 입솔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자기만의 방',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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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이러한 시련은 무한히 가중된다고 나는 텅 빈 서가를 보며 생각했지요. 우선 조용한 방이나 방음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의 아량에 달려 있던 용돈은 옷을 사 입는 데나 족할 정도였으므로 그녀는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처럼 가난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 도보 여행이나 짧은 프랑스 여행,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족의 압제와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 등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물질적 곤경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물질적인 시련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키츠와 플로베르와 그 밖의 천재적인 남성들이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말하지요.('자기만의 방', 8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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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자기만의 방',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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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입니다.('자기만의 방', 146~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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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더라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하지요. 콜리지가 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 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 됩니다.('자기만의 방', 148~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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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나는 남성의 동료라든가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감정을 찾을 수 없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하고 나는 말할 겁니다. 그 말을 고귀하게 들리게끔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오로지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십시오.('자기만의 방',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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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에 대한 그녀의 해석 역시 남자 형제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로 인해서 그녀는 애국심에 대한 남성의 정의와 거기서 비롯되는 의무감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당신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이 남성을 전쟁으로 이끄는 이유와 감정, 충성심을 이해하는데 달려 있다면, 이 편지를 갈가리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편이 나을 겁니다. 이런 차이점들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이 명백하니까요. 태어나기를 다르게 태어나듯이 우리의 사고가 다르다는 점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3기니',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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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에서 교육받은 남성의 아들들은 공무원, 판사, 군인으로 일하고 그 일에 대한 보수를 받습니다. 다른 세계에서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은 아내, 어머니, 딸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에 대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 아내, 딸의 노동은 화폐로 환산해 볼 때 국가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걸까요?('3기니',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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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는 온 역사를 통틀어 나를 노예로 취급해 왔다. 우리 나라는 나를 교육시켜 주지 않았고, 그 자산의 조그마한 몫도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내가 외국인과 결혼하면 더 이상 '우리' 나라가 아니다. '우리' 나라는 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을 나에게 허용하지 않으며, 나를 보호하도록 매년 막대한 금액을 다른 사람에게 지급하도록 강요하고, 그러면서도 나를 보호할 능력이 없어서 벽 위에 공급경보를 써놓는다. 그러므로 당신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또는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고 주장한다면,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당신은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성적 본농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공유하지 못했고 아마도 공유하지 못할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 나의 본능을 충족시키거나 나 자신 또는 나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아웃사이더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사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나는 어떤 나라도 원하지 않는다. 여성으로서 나의 나라는 전 세계이다."(348쪽, '3기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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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그 사진이 나타내는 악을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작정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말이지요. 당신과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도움도 달라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척이나 불완전하고 대단히 피상적인 설명이라는 점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러나 그 한 가지 결과로서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당신의 말을 반복하거나 당신의 방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을 찾아내고 새로운 방법을 창조함으로써 당신이 전쟁을 방지하는 데 최선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 협회의 목적에 동조하지만 그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그 단체의 바깥에 아웃사이더로 있으면서 당신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모든 남성과 여성-이 정의와 평등과 자유라는 위대한 원칙을 몸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불필요합니다. 당신이 이 말을 우리와 같은 식으로 해석할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404쪽, '3기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