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사진의 용도》, 1984BOOKS, 2018.

시월의숲 2020. 7. 25. 18:06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 나는 줄곧 우리 관계의 시작부터 잠에서 깨어나 그것들을 발견하며 매료되고는 했다. 매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각자가 물건을 줍고 분리하며 그 풍경을 허물어뜨려야만 하는 일은 내 심장을 옥죄었다. 단 하나뿐인, 우리들의 명백한 쾌락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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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반응은, 옷과 속옷으로 반점을 대신한 로르샤흐 테스트를 마주한 것처럼, 물건의 형체 속에서 존재를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실에도, 그날 아침에 찍은 사진에도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 사진을 읽는 것은 내 기억이 아니다. 나의 상상력이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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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가 지나고 사진들이 쌓였다. 모두 몇십 장이 되었다. 즉흥적인 제스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내 물건을 가져올 때, 그 조화로운 형태가 파괴되는 순간에는 성스러운 장소와 유물을 더럽히는 것처럼 매번 내 가슴이 죄어들었다. 우리의 눈에 그것은 예술 작품만큼 아름다웠고, 옷감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색의 혼합은 놀라웠다. 마치 지금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짓을 영속시키기 위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죄악은 우리가 방금 저지른 일이 아니라 그것을 흐트러뜨리는 행위에 있었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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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후, 바닥에 버려진 모든 것들 중 신발이 가장 마음을 흔든다. 옆으로 엎어졌거나 반듯하게 서 있지만 반대 방향을 향한다. 혹은 속옷 더미 위에 부유하고 있지만, 항상 서로 떨어져 있다. 사진에서 두 신발 사이의 거리가 보이면, 그것을 벗으려던 거친 몸짓을 헤아릴 수 있다. 주차장이나 보도에서 발견하면 누가, 왜 벗었을까 궁금해지는 그런 신발들처럼 대부분은 따로 떨어져 있다.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는 의복과 다르게, 신발은 유일하게 사진 속에서 신체 일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순간 가장 큰 존재감을 구현한다. 가장 인간적인 액세서리다.(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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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리려 하지 않는 모든 믿음 중에 이것이 있다. 집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왜 아니겠는가. 르몽드지의 한 기사에 따르면 유전학자들은 여성들의 자궁이, 출산과 낙태에 상관없이, 그곳에서 만들어진 모든 아이들의 흔적을 보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80~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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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일이라는 상품이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가치하락과 사물, 보수가 매우 좋지 않은 일에 대한 모독으로 이뤄진 매혹적인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특징 없는 옷들과는 거리가 먼, 사랑을 나눈 후 버려진 우리들의 옷들의 작품들을 다정하게 생각했다. 이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 내게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물들에게 존엄성을 돌려주는 것이자,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의 '신성한 제복'을 만들려는 시도로도 보였다.(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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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을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아니 에르노), 연인이 치뤄내는 전투를 통해 죽음을 배우는 사람(마크 마리), 우리는 그들이 무음으로 주고받은 대화를, 비밀스러운 몸짓들을, 어느 날 아침, 행위가 지나가고 페허처럼 남겨진 것들을 담은 사진 속에서 알아차린다. 이곳에서 지난밤의 사랑과 욕망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 모든 것들을 최선을 다해 붙잡는 그들의 '시도'만이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그들의 계속에 동참하고 만다. 육체가 빠져나간 이 에로틱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글로 쓰인 사진을 눈과 손으로 더듬으면서, 살과 뼈가 없이 이뤄지는 에로스를 받아들이면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진으로, 글로 뛰어넘기를 어느덧 소망하게 된다.(177~178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