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시월의숲 2020. 8. 29. 23:22

"이건 마치 항상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기둥서방 앞에 서 있는 억지춘향의 꼴이 아니겠나. 그렇게 억지로 조증의 상태를 만든다고 해서 개조가 이뤄질까? 인간의 실존이란 물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흐름이라서 인연과 조건에 따라 때로는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며 때로는 호수와 폭포수가 되는 것인데, 그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 늘 기뻐하라, 벅찬 인간이 되어라, 투쟁하라, 하면 그게 가능할까?"

준은 말을 끊었다가 이번에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시바이(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시바이를 할 수 있다면 남고, 못한다면 떠나라. 결국 남은 자들은 모두 시바이를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모두가 시바이를 하게 되면 그건 시바이가 아니라 현실이 되겠지. 새로운 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진다네. 이런 세상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야. 자기를 속일 수 있다면 글을 쓰면 되는 거지."

"그렇게 양자택일만 남아 있는 것일까? 다른 길은 없을까?"

"우리의 불행은 거기서 시작됐지. 제3의 길이란 없다는 것."

"그럼 지금 자네는 시바이를 하고 있는 건가?"

기행이 다시 물었다. 

"내게는 번역이 시바이의 길이네. 몇 년 전까지는 자네도 마찬가지였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거야? 난 언제나 그게 궁금했어."

준이 물었다. 취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그러게.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렸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31~32쪽)

 

 

*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85쪽)

 

 

*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88~89쪽)

 

 

*

 

 

"아빠는 늘 우리 남매들에게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생명의 법칙은 그렇지가 않다고. 그러니 생명의 힘, 인간의 힘을 믿으라고. 그 힘은 살려는 힘, 살리려는 힘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대신에 저는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를 줄곧 생각해왔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황야에 버려지게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소련군과 미군은 식민지로 고통받았던 땅을 분할 점령했던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우리 민족은 서로를 죽이게 됐을까? 중앙아시아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저는 신생 공화국에서 스무 살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수많은 시체들을 보아야만 했어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걸레처럼 구겨진 채 핏물을 쏟아내는 몸뚱어리들을. 고여드는 피와 들끓는 구더기들을. 그런 풍경을 뒤로하고 젋은 군인들은 군가를 부르며 전선으로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지요. 집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제가 물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랬더니 아빠는 힘없는 목소리로, 빵이 식을세라 모포에 감싼 채 당나귀에 싣고 온 카자흐 여인들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모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그런 인민들의 힘이라며. 그 말을 듣고 저는 아이 때로 돌아간 것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믿을 수 없어요, 아빠, 다 거짓말이에요, 라고."(95~96쪽)

 

 

*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아무리 혹독한 시절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사전에서 '세상'의 뜻풀이는 이렇게 고쳐야 해요. 영원한 것은 없는 곳이라고.(117쪽)

 

 

*

 

 

"나는 1924년에 태어났고, 그 세상에는 늘 나보다 먼저 죽는 것들이 있었어요. 내게 전쟁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었어요.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164~165쪽)

 

 

*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그는 가방에서 주필에게 받은 소책자를 꺼내 읽었다. 그렇게 열심히 읽어가다가 '1935년 3월 초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조치에 따라 중국 왕청현 요영구 유격구에 조선인민혁명군 청년군사 정치 지휘성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단기 강습소가……'라는 문장을 만났다. 거기서 기행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1935년 3월'이라는 날짜만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기행의 내면에서 팽팽하게 유지돼오던 뭔가가 툭 하고 끊어져버렸다. 이 날짜만 그대로 두고 책에 실린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다시 조립한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행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189~190쪽)

 

 

*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

"예를 들면 어떤 꿈들인가?"

현이 물었다. 

"우선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었지. 제목은 사슴이면 좋겠고."

기행이 대답했다.

"그건 이뤄졌고, 그다음은?"

시집을 흔들며 현이 말했다.

"시골 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면 싶었고."

"촌동네 소반처럼 소박하네. 그리고?"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하지."

"또?"

"그게 다야."(223~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