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2020.

시월의숲 2021. 4. 20. 23:43

전통적인 종교들과 무관하게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이 아마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지냈더라면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9쪽, 카뮈의 서문, '섬'에 부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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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펼쳐 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해 내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15쪽, 카뮈의 서문, '섬'에 부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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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일상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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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삶을 살아가노라면 자연히 바로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절대로 그런 것 따위는 느끼지 않고 지냈으면 싶었던 감정들 속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이것'과 '저것'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라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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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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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소진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해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 "내 불안을 달래 다오." 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밤이 다가온다. 밤과 더불어 내게 낯익은 유령들이 깨어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잠이 그대를 삼킬 때,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따져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생각이 미칠 때,―나는 무섭다.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 장치조차 없다.'(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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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게 될 때면 그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은지, 그런 것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밖에는 별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때에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보편적인 생각들만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진다.(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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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란 한갓 광기요, 세계는 알맹이가 없는 한갓 수증기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 '경박한'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내 맘에 드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데,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날들을 견뎌 내려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 한 가지의 대상을 정해 그것에 여러 시간씩 골똘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은 없다.(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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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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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물론 혁명에 대한 희망 이외에)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란다. 그것들이 그렇게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 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내고자 할 때 찾아낼 수 있는 것이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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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행을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동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할 수 있는 그런 감동들 말이다. 그런 내면적 노래가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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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2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함'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 이상으로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생각들의, 그의 마음의 무(無)가 현실이 되어 있음을 본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주어져 있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 가질 수 없었다. 그 한계점에서 그는 지금까지는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 그러면서도 오직 그만이 원했던 그 이별이 결정적인 것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식했다고 말했다.(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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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엄청난 정적이었던가! 나는 그 단조롭게 퍼덕이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마치 자기의 수단을 상실한 비행사가 자기에게 전해 오는 음파의 파동만을 믿듯이 그 소리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냥 그렇게 걸어만 갔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어떤 무(無)를 향한 걸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잡아 주고 있는 어떤 줄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장밋빛과 흰빛의 바둑판무의 같은 카스바,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사창가의 푸른빛 정면, 상자 갑같이 반듯반듯한 유럽 사람들의 집들, 내 발밑에 펼쳐진 고등학교의 직사각형 교사들, 팔처럼 곡선을 그리는 해군청, 군데군데 쪽빛으로 짙어지는 푸른 바다가 나를 저희들의 존재에 참여시켜 주고 있었고 그 존재가 내겐 환상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의 존재보다 더한 환상도 덜한 환상도 아닌 것이어서, 우리는 나나 저희들이나 한결같이 아무런 의지할 버팀대도 없지만 서로서로를 지탱해 주고, 매 순간 우리들의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새어 나가도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서로의 피를 주고받음으로써, 그 자체로 환원된 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절대적 통일을 은밀하게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163~1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