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시월의숲 2021. 4. 23. 23:43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73쪽,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내가 몇 년 전에 살았던 지역의 사택 근처에 오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 삼 년 정도 살았는데, 사택이 1층이라서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신경쓰여 거의 창문의 커튼을 치고 살았다. 물론 베란다 창문에는 군데군데 불투명 시트지가 발라져 있긴 했지만, 커튼을 치는 것이 더욱 완벽하게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될 수 방법이었기에, 나는 답답함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다니는 사람도, 굳이 집안을 들여다볼 사람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때는 그냥 마음이 그랬다. 어쩌면 건물의 출입문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낯선 고장에서 혼자만의 고독감을 느끼며 나름 고립된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주말에 집에 가기 싫을 때면 혼자 사택을 나와 그 주위를 천천히 걷기도 하고, 그때도 지금처럼 때때로 혼자만의 생각을 끄적여보기도 했으니까. 당시 낯선 동네의 길도 익힐겸 동네를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도 천천히 그때의 기억을 짚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때 삼 년 정도 이곳에 살다가 다른 고장으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이 년간 있다가 다시 이 지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시 온 이곳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당연하게도) 어떤 익숙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새로 이곳에 온 지도 2년이나 지났지만, 전에 내가 살았던 사택에 와 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천천히 걸었다. 언덕 위에 있는 요양원과 장례식장, 낮은 층수의 아파트들과 빌라들, 학교와 가게들...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을 벗어나 냇가로 향했다. 건물들이 변한 것은 없었으나, 오래 전 내가 홀로 냇가를 따라 걷던, 나무와 풀로 우거졌던 숲 길이 지금은 다 파헤쳐져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다니기 편하게 좀 더 넓히기 위해서였겠지만, 나는 오래전 이 길을 걸으면서 느꼈던 호젓함과 은밀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려서, 무척이나 아쉬웠다. 나는 마치 과거의 기억을 도둑맞은 사람처럼, 조금은 허탈하고,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나무와 풀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린, 매끈하지만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는 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었다. 마치 대로에 벌거벗겨진 채로 걷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장 그르니에가 말한 어떤 '비밀'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이 고장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도 몰라. 지금은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달리, 내가 아는 사람과 나를 아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생기지 않았나. 그 시간에 왜 거기에 있었어? 거기는 왜 갑자기 간거야? 혼자서 갔다고? 왜? 이런 말들이 벌써부터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 작은 고장에서 익명성이란 고작 강아지에게나 물려줄 법한 일인 것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신경 쓰여 거의 매일을 커튼을 치고 살았던, 몇 년 전의 내가 다시 떠올랐다. 이젠 이곳도 내게 그렇게 낯선 도시(라고 하기에는 작은 고장이지만)가 아니게 된 것일까?

 

또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일까. 매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롭고 낯선 생활을 그리워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내 안에 있다. 그 마음이 지금 내가 있는 장소로 이끈 것이겠지만. 나는 정말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예감과 계시로 가득한 그런 삶을 나는 살고 싶었다(물론 그것이 결국 허황되며, 좌절감을 줄 뿐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만). 내 '비밀'을 '비밀'로 간직해 줄 수 있는 도시에서.

 

애초에 나는 장 그르니에의 저 문장들에서 느꼈던(카뮈가 경탄해마지 않았던) 매혹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역시 글이란 내가 생각한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매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롭고 낯선 생활을 그리워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지금의 나를 이끈 것처럼. 내 마음의 행방을(이 글의 행방과 함께)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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