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사람이 하는 일

시월의숲 2021. 3. 1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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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소설집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책의 첫 페이지를 읽다가 관둔다. 도무지 읽을 의욕이 일지 않는다. 책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아직 책의 첫 페이지도 다 읽지 않았으니까. 어제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을 다 읽었다.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아직 쓸 의욕이 일지 않는다. 읽고 싶은 의욕도, 쓰고 싶은 의욕도 없이, 나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그저 무슨 책을 읽었고, 앞으로 무슨 책을 읽을 것이라는, 일기도 뭣도 아닌, 그저 그런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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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달에 사서 읽고 있었던 책을 반품했다. 책의 반 정도 읽다보니 앞서 읽었던 문장들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말 앞서 읽었던 내용이 다시 나오는 거였다. 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내용의 일부분이 중복해서 실려있었다. 아, 이건 뭔가. 이런걸 파본이라고 하는건가? 나는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상황에 잠시 얼떨떨했다. 다음 날 출판사에 전화를 했더니, 파본의 경우 구입한 인터넷 서점으로 연락해서 반품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으로 전화를 해서 반품 신청을 했다.

 

그 다음 날 택배회사에서 와서 책을 가져갔다. 그리고 새 책이 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그 책을 반품시킬 것이 아니라 교환을 해야했던 것이다. 내가 필요한 건 환불이 아니라, 제대로 된 책을 다시 받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고객센터에서 반품을 할 것인지, 교환을 할 것인지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원망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다시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똑같은 책을 주문하고, 더불어 다른 책 몇 권과 클래식 음반을 여러 개 더 주문했다. 내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클래식 음반을 주문한 건, 지금 유투브로 브람스 교향곡 1번을 듣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들었던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는 참 멋진 음악이 아닌가! 라는 마음이 나를 클래식 음반을 사는데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반품하고 새로 주문하는 건 번거롭고 귀찮았지만, 자본주의가 또 내 주머니를 털어간 것 같아 속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아볼 책과 음반은 나를 분명 풍요롭게 해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욕심을 덜어내고 싶지만, 책에 대한 욕심만은 잘 버려지지 않는다. 그것마저 없다면 내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삭막할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책상 위에 놓여있는 박상영의 소설집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브람스의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어제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을 다 읽었고, 어쩌면 그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쓸지도 모르겠다. 아, 택배 기사가 아파트의 다른 동에 놓고 가서 내가 직접 찾아온,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도 있구나! 그렇게 돌고 돌아도 결국 나한테 오는 것은 올 것이고, 내게서 떠날 것은 떠날 것이다. 살다보면 파본이 오는 경우도 있듯이, 택배도 다른 집에 갈 수 있는 거겠지. 사람이란 그렇게 불완전한 거니까. 완벽한 사람이란 없는 거니까. 파본도, 잘못 간 택배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라는 제목의 소설을 쓸 수도 있고, 브람스의 교향곡을 연주할 수도 있으니까. 그게 사람이니까. 오늘은 아무 것도 하기 싫지만, 그렇게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걸 이렇게 쓸 수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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