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버지와 함께

시월의숲 2021. 5. 22. 22:32

부처님 오신 날, 아버지와 함께 절에 갔다. 나에게 부처님 오신 날은 그저 쉬는 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매 년 이 맘 때가 되면 아버지가 절에 가고 싶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내비쳐도 그저 하시는 말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굳이 내가 같이 가지 않더라도 아버지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절에 곧잘 다녀오시곤 했으니까. 그렇다고 아버지가 절에 주기적으로 다녔다거나, 한 번이라도 시주를 했다거나, 연등을 샀다거나, 초를 사서 올리거나 그 흔한 기와에 가족들 건강을 기원하는 말 같은 것을 적은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절에 가자는 건 그냥 심심하니까 혹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니까 한 번 가보자는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굳이 무슨 날이 아니더라도 햇살 좋은 날 한 번씩 가까운 절에 다녀오곤 했으니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때 읽고 있던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라는 소설 때문이었는지도. 소설 속 화자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내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설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여러 해를 거치면서 이맘때만 되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시던 말씀이 이제야 마음에 걸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아버지와 함께 내가 사는 고장에 있는 제일 큰 절에 갔다. 절밥을 먹기 위해 점심때쯤 도착했지만 코로나의 여파 때문인지 공양간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예 식사를 제공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색색의 연등이 보광명전이라고 적힌 건물의 기와 끝에서 마당 쪽으로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보광명전 삼존불 앞에서 인사를 하고 절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없었다. 전날까지 비가 오고 기온이 살짝 내려가서 선선했으나 그날은 햇살이 눈부셨고 햇살 아래를 걸을 때는 살짝 더웠다. 보광명전 앞에는 물 위에 작은 부처상이 갖가지 꽃들에 둘러싸인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위로 물을 떠서 붓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아기 부처를 씻기는 모습처럼 보였다.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무 국자로 물을 떠 작은 부처상 위에 붓고는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여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이 꽤 엄숙하고 간절해 보였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어떤 기도를 했을까 궁금했으나 묻지 않고 그저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기만 했다. 

 

절을 내려오면서 아버지는 원래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을 세 군데 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처음 듣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재차 물었으나 원래 그런거라고만 말하고는 왜 그래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절을 꼭 세 군데 가야 부처님의 은덕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으나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다른 절 두 군데를 더 들렀다. 두 번째로 들른 절에서 아버지는 오래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했고, 다른 한 군데는 정말 오랜만에 오는 절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오래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절과 정말 오랜만에 오는 절 사이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두 절에서도 처음 들렀던 절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기 부처님을 씻기고 합장을 한 후 기도를 했다.

 

세 번째 절을 나올 때, 우리도 기와에 뭐 하나 쓰고 올까? 라며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이미 세 군데의 절을 다 들렀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싶었으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는, 글쎄요, 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무 말없이 쌓여있는 기와를 지나쳐 절을 나왔다. 앞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버지 마음이 편하신 대로 하세요,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불현듯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을 세 군데 다녀왔다는 것에 만족해하시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기와를 사서 기원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괜한 말을 했구나. 아버지는 말했다. 그 순간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대문 앞에서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회색의 승복을 입은 중이 서 있었다. 중은 들고 있던 보자기를 펼쳐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거기 쌀이 들어 있었다. 중은 내게 쌀을 시주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밥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중이 가지고 온 보자기에 넣어주었다. 집안에는 할아버지와 나, 이렇게 두 명이 있었다. 중이 가고 난 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뒤늦게 내게 물었고, 나는 어떤 스님이 쌀을 달라해서 주었다고 말했다가 할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났다. 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니 아버지는, 그때 네가 아무런 사심 없이 시주를 해서 지금 이렇게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그 중이 소위 말하는 땡중일지라도 사심 없이 베푸는 그 마음이 중요한 거라며.

 

정말 그런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부처님 오신 날, 아버지의 마음을 좀 더 헤아려보고자, 아버지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면 좋겠다 싶어서 절에 가자고 했으나, 결국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보다는 어쩌면 내 마음을 더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이고 눈을 감은채 고개를 숙이며 했던 기도가 사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이천이십일년 오월, 부처님 오신 날에 세 군데의 절에 들렀다. 지금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 얼굴의 스님에게 준 하얀 쌀처럼, 참으로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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