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시월의숲 2021. 4. 11. 17:44

어제 숙직을 하고 오늘 아침에 일터를 나왔다. 눈부신 봄날!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날이었다. 바람은 살짝 선선하지만 햇살은 온기를 품고 있는 전형적인 봄 날씨. 벚꽃은 이미 지고 그 자리에 연둣빛 잎사귀가 필 준비를 하고 있고, 벚나무가 아닌 나무들은 벌써 수줍은 연둣빛의 여린 잎사귀를 내밀고 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바라본 봄날의 풍경이 무척 따사로워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봄의 온기에 너무 취한 탓일까? 집에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생각나 뭐라도 좀 사야지 싶어서 마트로 향했다. 우선 제과점에 들러 빵을 몇 가지 사고, 마트에 들러 우유와 짜파게티 등을 샀다. 내가 간 마트에는 고객이 직접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게 되어 있어서, 나는 내가 산 몇 개의 물건을 선반에 올려놓고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카드 결제까지 다 마친 후 나는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서 밀린 빨래를 돌리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는데, 무선 청소기를 돌리다가 그만 얼마 전에 사다놓은 도자기 화병을 넘어뜨려 깨고 말았다. 나는 화병이 넘어지는 순간의 그 아찔함과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예견한 막막한 기분을 생생하게 느꼈다. 마치 내 실수로 다쳐 쓰러진 전우의 몸을 감싸듯, 이미 깨져버린 도자기를 손에 들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 자신의 어리석고 부주의한 실수를 탓하며 울고 싶었으나 실제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자책과 후회가 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강력 본드를 사서 붙인 후 깨진 부분을 보이지 않게 놓아둔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깨진 화병을 치우고 난 뒤, 뭐라도 좀 먹어야겠다 싶어서 아침에 제과점에서 사온 빵을 찾았다. 그런데 집 안 어디에도 빵이 없었다. 빵을 담아놓은 종이가방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나 자신의 건망증을 탓하며, 차에 놓고 왔나 확인하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차 안에도 빵을 담은 종이가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하얘졌다. 그 자리에 선 채로, 내가 빵을 어디에다 놓고 왔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아... 마트에서 계산을 하기 위해 빵이 든 종이가방을 선반 옆에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를 몰고 마트로 가보니, 다행히도 빵이 담긴 종이가방이 그 자리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직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종이가방을 들고 마트를 나왔다.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햇살 눈부신 봄날, 내 정신은 어디에 놓고 다니는 건지. 

 

아침에 있었던 소소하지만 나름 후회와 자책, 어리석음과 분노의 여러 감정들을 오갔던 소동이었다. 집에 와 종이가방에 담긴 빵을 꺼내 내린 커피와 함께 먹고 있으니 실실 웃음이 났다. 아, 또 이건 뭔가. 이 웃음의 의미는. 야채가 든 고로케는 맛있고, 커피는 향기롭고 유리창으로 비춰 드는 오전의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나는 순식간에 화병을 깨고, 빵이 든 종이가방을 마트에 놓고 와서 다시 가지러 가야 했던 일련의 소동이 다 뭔가 싶었다. 그건 그거고, 내 입으로 들어온 빵과 커피는 또 그것대로 맛이 있으니.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소설의 인물들처럼 내가 심각하고 중대한 상실과 좌절을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 봄날에, 아무 이유없이(물론 아이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칭얼대는 어린아이처럼, 나도 아무 이유 없이(나 또한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칭얼거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 이 따사로운 봄날에게. 내 실수의 원인을 이 봄날에 찾는 건 너무나 이기적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과 함께.

 

 

 

*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을 인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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