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페소아

시월의숲 2021. 10. 15. 22:10

페르난두 페소아.

한 번이라도 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 배수아 역, 『불안의 서』, '옮긴이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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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고부터 그는 늘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결코 설명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생의 비밀을 마주할 때면 늘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페소아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페소아 연구자라 일컫는 김한민이라는 작가가 쓴 <페소아>를 읽게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페소아의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페소아라는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람을 뜻한다는 것, 그 어원이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라는 것, 또한 페소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페르손느가 되고 이는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미 그에게 빠져들었음에도 이 책을 읽고 더욱 그를 각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빠져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마치 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아련하게 젖어드는 저녁노을처럼.

 

이 책은 페소아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도 아니고, 페소아가 쓴 시 혹은 산문도 아니다. 이것은 무수한 이명을 탄생시켰으나 그 자신은 무척이나 고독했던 포르투갈 태생의 시인 페소아에 대한 글이다. 그렇다. 그냥 페소아에 대한 글인 것이다. 페소아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한 설명서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가지고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는 페소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앞으로 그를 더 깊이 읽기 위한 포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페소아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이들에게는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책만으로는 페소아의 매력이 무엇인지 가슴에 와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그의 <불안의 서>로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페소아지만, 가장 많이 알려지고 회자되는 산문집인 <불안의 서>를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저자는 <불안의 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언뜻 일기처럼 보이긴 하지만 날짜나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기록 없이 상념, 관찰, 사색이 주를 이루기에, 일기라기보다는 책 속 표현대로 '사실 없는 자서전'에 가까운 산문이다. 페소아가 1913년에 처음 쓰기 시작해 1920년까지 쓰다가 약 8년간의 공백 이후 1929~1934년 동안 다시 붙잡은 원고들로, 끝내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진 원고 상태로 봉투 속에 보관되어 후대에 전해졌다. 그가 죽은 지 47년 후, 즉 1982년에야 처음으로 출판되었다."(122쪽)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필명으로써의 이름이 아니라, 각기 다르면서도 무수한 이명을 탄생시키고, 그 이명들에 각각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글을 쓰도록 만들었던 독특한 작가 페소아. 그의 사후 자택에서 발견된 가방 안에는 그가 쓴 미발표 글이 3만 장 정도 들어있다고 하니,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써 뿐만 아니라 무수한 이명으로써 글을 써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의 내면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무수히 많은 그가 존재하고 있었고, 무수히 많은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아우성쳤던 것이다. 그는 배수아가 말한 대로 '모종의 사로잡힘'의 상태에서 그것을 쓰지 않았을까. <불안의 서>가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듯, 그는 언제까지나 완결되지 않은 채로, 무수히 분열하는 존재로, 어디에나 있지만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비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김한민의 책을 읽었지만, 배수아가 쓴 글로 처음과 끝을 쓴다. 어쩐지 김한민의 책을 읽고 나니 배수아가 쓴 글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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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는 페르소나이며, 가면이고 허구다. 즉 페소아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로 인하여 그 누구도 아니다. 그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복수다. 페소아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와해되는 작가의 정신, 부조리하게 술렁이는 불가능의 숲을 향해 영원히 산란하는 작가의 영혼에 부여된 이름이다. 페소아는 거기에서 왔다.(배수아 역, 『불안의 서』, 80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