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착각하는 삶, 착각 속의 삶

시월의숲 2022. 5. 23. 22:56

'우리가 진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다.'라고 페르난두 페소아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는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소름 끼치는 진실이 아닐까?'

 

꿈 혹은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어나려 하지 않는 것. 혹은 그것을 외면하는 것. 착각하는 삶. 그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쩌면 인생이란 거대한 착각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네 삶이 거대한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그곳에 머무는 것은 아닌가. 깨어나는 것은 거대한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두려움을 직시하는 일이기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삶은 편하고, 달콤하다. 하지만 거기서 깨어나 진실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 눈이 멀거나 미칠지도 모른다.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나는 살면서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자괴감과 자기 연민의 늪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평소에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쓸데없는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지만, 예기치 않는 순간에 그것은 물 밀듯이 밀려와 나를 점령하고 스스로를 한없는 나락으로 빠뜨리고 만다. 그것의 유혹은 생각보다 달콤하여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일종의 허영심인가? 고독을 액세서리처럼 걸치고, 우울한 제스처를 취하며, 자기 자신을 향해 서슴없이 칼질을 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은 자존감을 높이고 싶은 나만의 모순적인 방어기제 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스스로를 한없이 비하하면서 속으로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그보다는 조금 낫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이 아닌가.

 

페소아는 또 말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허영심을 갖고 있다. 이 허영심 덕분에 사람은 다른 이들도 자신과 유사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의 허영심은 몇 페이지의 글이며, 몇 단락의 글이고, 숨길 수 없는 회의다.'

 

내겐 이 블로그가 내 허영심의 산물 중 하나이리라. 이 허영심 덕분에 나는 다른 이들도 나와 유사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 혼자 유일하고도 남다른 영혼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안다. 언젠가 착각에서 깨어날 것이다. 두려움을 직시하고, 고통 속으로 아무런 시름없이 걸어 들어갈(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상은 착각 속에 안주하게 할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문을 잠그고, 거기 머문다.

 

 

*

오래 전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고 든 단상들을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다시금 그것을 읽고 있다. 페소아의 글과 그 글을 읽고 쓴 내 생각들을. 이 글은 다시 읽은 페소아에 대한 또다른 독후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불안의 서』를 읽고 쓴 독후감에 대한 독후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