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는 것은 작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작가는 무엇에 저항하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당도, 특정한 이념도, 구체적인 어떤 체제나 심지어 지상의 불의나 부조리조차도 아니다. 작가가 저항하는 것은 것은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의 운명이다.
노래하는 것은 작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다. 작가는 무엇을 노래하는가? 작가는 행복이나 충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아나 예술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가가 노래하는 것은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의 운명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한번이라도 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종종 생각했다. 이 세상은 페소아를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로 나뉠지도 모른다고. 페소아, 그 이름은 우리에게 어떤 성격을 환기시킨다.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페소아적인 감각과 페소아적인 꿈의 질감을. 단 한번도 똑같이 반복하는 법이 없는,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구별되는 태주 강 위 구름의 색채를.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부조리한 시선을. 깊은 밤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를. 수많은 색으로 해제되는 감각과 느낌들을.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봉인된 삶이라는 현상의 비밀을.
"우리는 오직 우리의 감각만으로 '실제'를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한다'는 것 역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감각'이란 어휘 자체에도 아무런 의미가 들어 있지 않고, '의미가 들어 있다'는 말 역시 의미를 가진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의 동일한 비밀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뭔가를 의미할 수 없음을, 혹은 '비밀'이 어떤 의미를 가진 어휘가 될 수 없음을 느낀다."
- 《불안의 서》에 관한 페소아의 메모 중에서
그는 우리가 다른 작가를 위해서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특별한 수사를 요구하는 작가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수사도 불필요해지는 작가다. 페소아는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읽어야만 하는" 작가에 속한다. 그는 평가되거나 언급되거나 해석되거나 비판되거나 혹은 칭송받기 위해 있는 작가가 아니다. 심지어는 사랑하기 위한 작가도 아니다. 그 누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어떤 문학 외적인 것의 대상도 아니며 그럴 필요나 이유가 없다. 마치 꿈이 '앎'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꾸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듯이. 페소아는 오직 읽혀지기 위해서 거기 있는 작가다. 그 밖의 일은 사실 전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모든 감각의 영역 바깥으로 물러서서 꿈의 방식으로 존재하므로. 우리의 이성은 그를 검증하거나 분석할 수 없고 우리의 철학은 그를 모른다.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를 읽는 것뿐이다. 오직 이것을 이해하는 자만이 그의 "사실 없는 자서전"인 《불안의 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우리는 이미 "페소아"라는 이름에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설명 없이 깨닫는다. 페소아는 페르소나이며, 가면이고 허구다. 즉 페소아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로 인하여 그 누구도 아니다. 그는 우주 자체만큼이나 복수다. 페소아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와해되는 작가의 정신, 부조리하게 술렁이는 불가능의 숲을 향해 영원히 산란하는 작가의 영혼에 부여된 이름이다. 페소아는 거기에서 왔다. 고대 로마의 극작가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가 암시했듯이, 노멘 에스트 오멘Nomen est omen, 이름은 하나의 징후다.(805~807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 옮긴이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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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4년에 출판되었다. 이미 이전에 <불안의 책>이란 이름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읽고 있었지만, 배수아가 번역한 <불안의 서>가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다. 햇수로 4년이나 지난 지금, 이제서야 겨우 페소아를 조금 알 것도 같은데, 이것은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불안의 서>를 항상 곁에 두고 조금씩 읽곤 했다. 아, 그러니까 처음 한 번 다 읽고나서 메모해놓은 페이지의 부분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이다. 페소아의 글은 한 번 읽었음에도 다시 읽는동안 새로웠으며 재차 놀라웠다. 나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마다 늘 새롭고, 현재진행형의 불안이 나를 자극한다고 느꼈는데, 이는 페소아의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형도와는 다르게 페소아는 늘 꿈 아닌 꿈을 꾸고 잠 아닌 잠을 자는 등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페소아의 글은 좀 더 부유하는 느낌,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배수아의 말처럼 그의 글이 '영원히 알 수 없게 봉인된 삶의 현상이라는 비밀'을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페소아적인 감각과 페소아적인 꿈의 질감으로 이루어진.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의 운명'에 저항하고, 역시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하는 작가, 페소아. 그는 진정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읽혀지기 위해' 존재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나는 배수아가 지적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페소아라는 이름은 내게 하나의 징후가 될 것이며,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될 것이고, 내가 어딜가든, 어디에 있든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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