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대 영혼 위에 뜨는 별

시월의숲 2022. 3. 5. 22:24

 

*

고모는 종종 내게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산 책 중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지금 집에 있는 10권의 태백산맥 중에 절반은 내가 심부름으로 사 온 것일 게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꽤 잘 나갔던 동네 서점에 들어가 태백산맥 5권 주세요,라고 쭈뼛거리며 말한다. 그러면 서점 주인은 책장에서 태백산맥을 꺼내 계산대 옆에서 책을 종이로 싸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책 표지를 종이로 싸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서서 서점 주인이 책을 정성 들여 싸는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이 좋았다. 책이란 소중히 다뤄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책은, 속에 책갈피를 품은 채 누런 봉투에 넣어져 내 손에 전달되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고모에게 전해 주었다. 고모가 책을 다 읽으면 그다음엔 할아버지가 읽었다. 책 표지가 종이로 싸였기 때문에 안을 펼쳐보지 않으면 무슨 책인지 몰랐으므로, 할아버지는 책등에다가 책의 제목을 멋들어진 필체로 써놓았다. 그렇게 고모 방에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쓰인 책들이 책장 가득 꽂히게 되었다. 책을 찾기 위해서는 책장을 봐야 했고, 책장을 보면 제일 먼저 할아버지가 쓴 책의 제목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종이 위에 쓰인 책의 제목만을 보고 무슨 책일까 상상하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 책의 완성은 출판 혹은 독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책의 제목을 쓰는 것으로 완성되었다.(2013.11.17.)

 

 

*

위 글을 써놓고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날 문득 내가 본가에 갔을 때 책장 한편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을 찍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나는 늘 오래전 고모 방의 책장을 가득 메우던 할아버지의 필체로 적힌 책들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일제히 정리가 되고 버려지던 시기에 나는 없었고(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나는 그 책들을 지킬 수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고, 아무런 의견도 낼 수 없었던 과거가 후회스럽고 안타까웠지만 버려진 책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후회와 안타까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본가에 들러 책장을 훑어보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가 쓴 글씨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낡은 저런 책들이 어째서 아직까지도 버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했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마치 할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뒤늦게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놀라웠고 무척 기뻤다. 궁서체의 글씨. 할아버지만이 쓸 수 있던, 선이 굵고 바른 글씨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 필통 속 연필을 직접 깎아주시던 할아버지, 교과서를 흰 달력으로 싼 다음 과목명을 적어주시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나를 사로잡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감정의 밑바탕에는 늘 할아버지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웠으나, 미운만큼 측은했고, 측은한만큼 슬펐다. 할아버지의 삶이, 그리고 그에게 의탁한 내 삶이. 할아버지는 늘 아팠으나 나는 그 아픔을 헤아릴 길이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나는 할아버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그늘이었다. 죽을 만큼 벗어나고 싶다가도 때론 그 아래 앉아 숨을 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직장을 잡고 일 이주에 한 번 정도 할아버지를 보러 오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할아버지는 이미 지병이 악화되어 많이 힘들어할 때였는데, 내가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오면 할아버지는 늘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나를 배웅했다. 나는 식사 잘 챙겨 드시라는 말을 하고 돌아 나오다가 다시 대문 쪽을 돌아본다. 대문 앞에는 지팡이를 짚고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말하는 할아버지가 서 있다. 차 조심하고!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든다. 들어가세요, 할아버지.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평범했던 나날들의 기억. 나는 그때,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먼 훗날 이렇듯 생생하게 떠오르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그대의 영혼은 저 별처럼 언제나 내 가슴속에 떠 있음을 당신은 아시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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