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던 따스한 햇살과 바람처럼

시월의숲 2022. 3. 9. 16:59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투표장에 도착했다. 사전투표의 영향인지 아니면 원래 선거인이 적은 건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소독젤로 손을 소독하고 신분증을 제시하고 명부에 내 이름을 적은 뒤 투표용지를 받았다. 무려 열네 명의 후보가 나온 제20대 대통령 선거였다. 엄마 혹은 아빠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부모들은 자신들이 투표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무어라 설명을 했고 아이들은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부모가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졌다. 

 

투표를 하고 집으로 바로 가려 했으나 날씨가 가만 놔두질 않았다. 투표장이 설치된 학교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입고 있는 패딩점퍼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갑자기 목이 말랐으나 물 비슷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켰다.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걷다 보니 나무와 아파트로 가려지지 않은, 시야가 환하게 트인 공간이 나왔고 나는 그 전경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직은 갈색의 겨울 풍경이었지만 눈부신 햇살과 따사로운 바람이 이미 겨울의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순간 경쾌한 새들의 지저귐이 머리 위로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으나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뜻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만이 촉촉하게 내 귀를 적셨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익숙하고도 아련한 감정이 솟구쳤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설명하지도, 묘사하지도 못한다. 표현할 길 없는 그 감정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렇게 산책을 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햇살과 바람이 조금이라도 더 들어올 수 있도록. 이젠 창문을 여는 것에 서슴없어지는 계절이 아닌가, 깨달으면서.

 

날씨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오늘은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오늘 투표를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당연히 국민의 일원인 내 권리라고 생각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무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권리의 행사와 함께 의무를 이행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후련함. 며칠 전 사전투표를 한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어떤 이는 떨어뜨리기 위한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니, 참으로 참담하지 아니한가. 그 참담함이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 또한. 하지만 어쩔 것인가.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더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전 내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정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던, 그야말로 무지와 무관심의 상태였다(지금도 별반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나만의 '생각'이라는 것이 생겼으니 조금은 컸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정책이라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힘없고 차별받는 자를 보는 시선이 어떤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은 그것이 그리 거창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부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듣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 그러니까 차별에 대해, 힘 없는 자, 소수자들이 느끼는 폭력을 섬세하게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오늘 나를 산책으로 이끌었던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처럼,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사람이 내 나라의 지도자이길 바란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인 걸까. 혹은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거나 이상적인 바람일 뿐인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니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저 햇살과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