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기형도를 읽는 밤

시월의숲 2022. 2. 23. 23:21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

기형도를 읽는 밤.

 

갑작스럽고도 정체모를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을까. 거의 잊고 있었던(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기형도를 꺼내 읽는다. 현재 진행형의 불안이 나를 감싼다고 언젠가 나는 썼다. 그의 불안으로 내 불안을 덮을 수 있을까. 우리는 각자 다른 불안의 내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기형도의 시집을 꺼내서 읽기 전까지 나는 알 수 없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정말 오랜만이었고, 늘 그렇듯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루 종일 내 몸 어딘가에 숨죽이며 잠복하고 있다가 내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내 영혼을 잠식한다. 나는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이유 없이 초초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위로할 수 없다. 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밖에는.

 

그러다 문득 기형도가 생각났다. 처음에는 책장에 꽂혀 있는 최승자의 시집이 보였으나, 곧이어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 기형도가 생각났다. 나는 그의 시집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심장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활자에 집중한다. 그의 불안에 스며든다. 불안은 전이된다. 무언가 동화됨을 느낀다. 나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시를 읽는다. 그것에 매달리듯, 온 힘을 다해, 가까스로. 어느 순간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나는 조금씩 늪에서 빠져나온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 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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