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시월의숲 2022. 3. 1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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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장을 읽는다.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중에서)

 

또 이런 문장.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독毒보다 빠르게 독보다 빛나게 싸울 것을.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요즘 이런 문장들을 곱씹고 있다. 쓴 약을 씹어 삼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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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했다. 지금은 시작이 아니냐고. 아직은 좀 지켜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나는 벌써부터 음험하고 사악한 기운을 느낀다. 어떤 이는 말하겠지. 너는 망상에 빠져있구나! 정말 그랬으면, 정말 그런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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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대화의 끝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으면서도 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러려니 해야지', 하면서도 '그래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왜 숨길수가 없는 걸까. 이상하지. 정치 이야기가 이렇듯 슬픈 주제였던가? 벽을 바라보며 혼자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서로의 말이 서로를 막아 결국 벽을 만든다. 너는 내 앞에 있고 나도 네 앞에 있지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서로 멀어진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서글픔의 강만이 범람할 뿐. 우리는 그 강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는지 알지 못한채 입을 다문다. 고개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