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시월의숲 2022. 3. 27. 15:14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자면,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조차 알 수 없겠지만, 이것저것 조금씩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좋아하는 글의 형태와 종류를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게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게 되면 당연히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고 싶어질 것이고, 그것을 하나씩 읽어나갈 때의 희열을 알게 될 것이다.

 

천재 혹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설치는 자는 결코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듯이, 천재가 아니고 별다른 재능도 없는 나는, 즐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즐기는 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아서, 일단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딘가에 한 순간이나마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 매혹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결코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함정임은 『나를 미치게 하는 것들』이란 책에서 '감탄하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바로 배수아다(내 글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익히 알겠지만). 나는 배수아의 모든 책을 읽고 싶어서 지금은 품절되어 판매되지 않는 책들을 중고로 구입하기까지 했다. 내가 소설 혹은 시를 쓰는 작가들의 팬보다 더 좋은 점은, 그녀가 번역까지 한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배수아 자신의 창작물뿐만 아니라 그녀가 번역한 책들까지 다 읽을 수 있으니 그 즐거움은 더 배가되지 않겠는가. 특히 그녀가 번역한 책들은 그녀 자신이 매혹되지 않았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책들로 특별히 선별되어 있으니 그 자체로도 이미 내겐 그 책들이 배수아의 책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배수아로 인해 페소아를, 제발트를, 로베르트 발저를,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를, 샤데크 헤다야트를, 예니 에르펜베크를, 야콥 하인을 알게 되고 읽게 되었다. 또한 카프카를, 헤세를, 페터 한트케를, 막스 피카르트를 새롭게 읽게 되었다. 이건 어쩌면 대단한 일이 아닐까? 그것을 읽은 내가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작가로 인해 그것을 읽을 마음이 생기고 급기야는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낯간지럽지만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배수아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했다. 더 많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한 가지 매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배수아가 번역한 책들의 제일 뒤편에 실려있는 '옮긴이의 말'에 관해서다. 역자는 통상적으로 자신이 번역한 책에 옮긴이의 말을 싣는다. 내게 옮긴이의 말이란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단순히 자신이 번역한 작가와 책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건조하게 나열하거나 진부한 감상이 전부인 것으로만 생각했다(실제로 옮긴이의 말을 읽고 흥미를 느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옮긴이의 말'을 읽고 이렇게 열광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배수아가 번역한 책들의 후기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을 읽기 전까지는. 나는 때로 책의 저자나 내용보다도(저자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배수아의 후기를 읽기 위해 그 책을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그녀의 후기에는 그녀 특유의 시선과 그것을 표현하는 그녀만의 매혹적인 언어가 있다. 그것은 배수아 자신이, 스스로 번역까지 하게 만든 그 책에 대한 개인적인 '사로잡힘'이 없었다면 결코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옮긴이의 말 때문에 그 책들이 더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그로 인해 외국의 새로운 작가들을 알게 되고 재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나는 배수아가 번역한 책들도 배수아의 소설만큼이나 좋아하게 되었으며, 특히 페소아와 제발트의 경우에는 내게 굉장히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또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경우, 작가 자체의 독특한 문체와 지독한 혐오, 냉소적인 시선이 배수아라는 번역가의 존재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좀 특별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배수아가 번역한 카프카의 『꿈』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글'을 읽는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라는 제목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카프카의 꿈에 대한 작가만의 변형된 꿈인가? 카프카의 글을 번역한 뒤 역자가 느낀 감흥을 꿈이라는 소설로 형상화한 것인가? 나는 카프카의 꿈속에서 배수아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과 꿈은 이어져 있는 것인가? 이런 식의 역자 후기는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나는 그것이 배수아의 단편소설이라는 것을 『뱀과 물』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뱀과 물』의 제일 처음에 당당히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의 그 아찔한 아득함이라니. 그렇게 매혹은 꿈처럼 이어진다. 나는 그것을 낯선 미지에의 매혹이라고 부른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어느 곳에 배수아는 있다. 마치 환상 혹은 꿈처럼. 그녀는 늘 그곳에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한번에 알아볼 순 없지만,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매혹적인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무엇엔가 홀린 듯 그 특정하고도 독특한 방식의 초대에 응할 것이다. 

 

 

*

만일 네가 네 환상을 기록한다면,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네가 꿈으로 꾸는 묘사 불가능한 것들을 기록한다면, 그런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네 언어를 만들어낸다면, 하루하루 네 꿈을 기록한 노트를 당나귀처럼 어디든 짊어지고 다닌다면, 너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들과 안과 겉처럼 다를 수가 있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 성장하고 우거질 것이며, 그래서 너만이 산책할 수 있는 검은 숲을 이루게 될 거야. 오, 나는 바란다. 네가 숲이 무엇인지 알기를……(배수아, 『북쪽거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