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카프카를 읽는 사람

시월의숲 2022. 4. 3. 17:23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애플TV 드라마인 <파친코>의 원작 소설 작가 이민진의 하버드대 강연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소설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읽지 못했고, 인터넷 뉴스와 유튜브를 통해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최근 상영을 했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리고 애플TV의 파격적인 홍보의 일환으로 드라마의 1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1화를 다 볼 수도 있었지만 중반쯤 보다가 그만두었다. 드라마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애플TV에 가입하지도 않았거니와, 보려면 전체를 한꺼번에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도 작용했을 것이다.

 

작가의 강연은 몇 년 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한 것이었는데, 강연 전체가 아닌 일부를 편집한 영상이었다. 그 영상을 올린 이의 의도는 아마도 재미교포인 작가의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올바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거기서 말한 작가의 강연 주제보다도, 정체성이라는 것에 생각이 머물렀다. 그러니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자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한국의 아픈 역사 속에서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일본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아가 한국계 미국인이 느끼는 소외감과 고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어쩌면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소설을 읽지 못했으므로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하지만, 어쩌면 이 소설은 그러한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함과 동시에 나는 엉뚱하게도 오래전 배수아의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인터뷰의 출처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사실 찾을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짐작컨대, 그것은 아마도 배수아가 프란츠 카프카의 <꿈>이라는 책을 번역한 뒤에 한 인터뷰였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지금 생각나는 인터뷰의 내용이 바로 카프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인터뷰의 내용은, 희미하게 지워지고 남은 자국조차 식별되지 않을, 미미한 느낌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자면, 카프카에 대해서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읽는 동안은 '카프카를 읽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재미 작가 이민진의 강연을 보다가 배수아의 오래전 -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그 내용이 맞기나 한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 인터뷰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내 의식의 흐름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곤 한다. 하지만 그건 분명 별개의 것만은 아닐 거라는, 제발트가 말한 '모종의 연대' 같은 것이 있을 거라는 예감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그 두 개의 생각에 어떤 느슨한 연결고리라도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읽고자 하고 실제로 그것을 읽는다면, 적어도 그는 카프카를 읽는 사람이 되듯이, 이민진이 말하는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의 소설을 읽고 드라마를 본다면, 그는 적어도 그것을 읽고, 본 사람이 되고, 결국엔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어쩌면 내가 그 둘을 이어서 떠올린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에 대해서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그것을 읽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배수아, <회색 詩> 중에서)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든 이해해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자들에게 주는 배수아식의 위안이 아닐까. 그것의 이해 여부를 떠나서 카프카를 읽는 동안은 '카프카를 읽는 사람'이 되고, 셰익스피어를 읽는 동안은 '셰익스피어를 읽는 사람'이 되고, 페소아를 읽는 동안은 '페소아를 읽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일단 그것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나는 말하기 전에 그것을 '읽는' 사람이 된다. 결국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끝내 그것을 '쓰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