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걸었을 뿐인데

시월의숲 2022. 4. 8. 21:18

낮에 점심을 먹고 햇살이 환한 벚꽃길을 걸었다. 사무실 가까이에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벚꽃길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면서. 어제보다 오늘 벚꽃이 더욱 활짝 피어있었고, 그 때문인지 걷는 사람도 더 많이 보였다. 같이 간 동료들과 나는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연신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중 한 명은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그냥 이대로 쭉 벚꽃길을 걸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맞아, 맞아하면서 손바닥을 치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걷고 있을 뿐인데, 이게 왜 이렇듯 특별한 일이 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벚나무 아래서 이렇듯 함박웃음을 짓고, 왜 이렇듯 발걸음은 가벼워지는 것일까. 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걸었을 뿐인데.

 

이런 의문은 다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번졌다. 이것은 필시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저 환하게 핀 벚꽃을 보면 저절로 아름다움이라는 벅찬 감정이 차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단지 저 벚꽃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마냥 벚꽃길을 걷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이 벚꽃길이 계속된다면, 그래서 벚꽃이 지지 않고 사시사철 피어있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형용할 수 없이 충만하고 아쉬운 감정이 과연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까? 우리가 벚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봄날의 아주 짧은 순간이 아닌가. 피어있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다시 말해 순식간에 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양하는 것이 아닐까. 찰나의 순간에만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 그 이후에는 그 찬란했던 순간의 기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야 하므로. 우리가 벚꽃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의 정체는 아마도 그런 덧없음이 아닐까 하는.

 

아름다움은 덧없는 거야.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건지도. 

 

나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불쑥 혼잣말을 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환하게 웃으며, 감성적이시네요, 했다. 벚꽃 때문에 감성이 차오르는군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저절로 감성이 충만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충만해진 감성 때문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오고,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누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고개를 들면 거기, 티 없이 파란 하늘 아래 연분홍빛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므로. 그리고 그것은 이 지상에 짧은 순간 머물다 갈 것임을 잘 알기에. 그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걸.

 

 

*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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