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시월의숲 2022. 6. 7. 22:05

지금 내게 떠오르는 예는 모두 풍경화들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 위협이 도사리는 반수면 상태와도 같은 풍경. 특이하게도 그런 그림들은 모두 연작으로 그려졌다.(19~20쪽)

 

 

*

 

 

나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늘진 도랑에서 '그 시냇물'을 보았다. 나는 '그 돌다리'에 섰다. 거기 바위의 균열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있었고, 옆길에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길의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커다란 흑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무 향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영원히".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메모했다. "무엇이 가능한가 - 바로 이 순간에! 세잔의 길에는 침묵."(40~41쪽)

 

 

*

 

 

타인의 뿌리를 뽑는 일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잔악하나, 자기 자신의 뿌리를 뽑는 일은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41쪽)

 

 

*

 

 

한때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겨졌던 델피에는, 시인 크리스티안 바그너가 "신성한 망자들의 해방된 생각"이라고 불렀던 나비들이 경기장의 풀잎을 널리 흔들며 날고 있었다. 그러나 엑상프로방스와 르톨로네 사이 색채로 어우러진 인적 없는 자연 한가운데서, 생트빅투아르산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상의 중심이란, 델피와 같은 곳보다는 위대한 예술가가 작업했던 저 장소가 아닐까?"(42~43쪽)

 

 

*

 

 

위대한 화가의 영역에 머물면서, 나는 매일매일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낯선 환경은 도움이 된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나를 무시해준다. 시간이 갈수록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풍경으로 녹아들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것의 물체들(세잔의 물체들) 사이에 잘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65쪽)

 

 

*

 

 

'쓸 권리' - 모든 글에 대해서 매번 새로이 요구되는 - 는 바로 그날 생트빅투아르산을 내려오는 길에, 내가 나 자신을 비판하는 데 성공하면서(보통 산을 내려올 때 흔히 하듯이, 내 안으로 깊이 몰두하여 유머감각이 사라져버리는 대신에) 예고되었다. 빛으로 넘실대는 초원이 나타나자 나는 즉시 '파라다이스 가든'을 떠올렸으며, 심지어는 두더지들이 파놓은 흙더미도 처음에는 '멀고 은은한 푸른빛에 감싸인'듯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아름다움이라고 해서 늘 하늘과만 비교하지 말라. 대신 대지를 보라. 대지를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그냥 바로 여기 이 자리를 말하라. 그것을 그 자신의 색으로 불러라."(68~69쪽)

 

 

*

 

 

왜 나는 하필이면 쓴다는 권리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불특정한 사랑의 순간에 왔다. 그것이 없으면 당연히 글쓰기도 없게 되는, 그런 순간. 샛길 안쪽 깊숙한 곳에 서있던 뽕나무 한 그루가(실제로는 먼지투성이 흰 길에 떨어진 붉은 과즙 얼룩이) 내가 최초로 이성적인 기쁨을 생각할 수 있었던 1971년 여름 유고슬라비아의 붉은 뽕나무즙과 신선한 섬광 속에서 합치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시선이? 내 눈동자가? 어두워졌으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이 둥글고 깨끗하게 보였다. 또한 침묵이 있었다. 침묵과 함께 평범함 자아가 순수한 무명으로 변했고, 나는 변화의 충격 속에서, 단순한 무형 이상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었다.

그렇다, 그 황혼의 샛길은 이제 내게 속했고, 이름을 얻었다. 흙먼지 위에 떨어진 뽕나무 얼룩이 가져온 상상의 순간(다만 내가 온전히, 그리고 나에게 진실로 존재하며 진실을 깨달은 순간)은 단순히 내 삶의 파편들을 무결하게 조화의 상태로 통일시켰을 뿐 아니라 나와 타자, 나와 미지의 존재들 사이에 혈연과도 같은 유사성을 새로이 열어주었고, 그리하여 형성된 불특정한 사랑을, 충실한 형태로! 전파하고 싶다는 의욕을 갖게 만들었다. 결코 특정되지 않는 내 은밀한 종족의 결속을 위한 정당한 제안이며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존재의 형태인, 홀가분하고 활기차며, 대담한 글쓰기라는 당위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척의 배를 상상하듯' 평온을 느꼈다. 물론 곧 평소와 같은 고통이, 혹은 학대(물론 절망과는 반대이긴 하지만)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형태가 무엇인가? 여기 나라는 무결한 자는(나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죄가 없다고 여길 뿐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또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불특정한 독자여, 그림의 대상이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달라고, 당신들에게 한번이라도 제안한 적이 있었던가?)(68~70쪽)

 

 

*

 

 

사물-그림-문자가 하나 되는. 이런 전례는 없었다. 하지만 내 가까움의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언젠가 내가 풍경을 향해 나 있는 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중국 활자라고 여겼던 실내용 화초들이 있긴 하다. 그런데 세잔의 바위와 나무는 그런 활자 모양 이상이었다. 지상의 흔적이 없는 순수한 형체 그 이상. 거기에 더해서 화가의 손에 의한 극적인 붓놀림(그리고 가는 붓선) 덕분에 정교한 주술로 조성되어, 처음에는 내가 그저 "이처럼 가깝다니!" 하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태고의 동굴회화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것은 사물이었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그것은 활자였다. 그것은 붓이 지나간 자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하나였다.(75쪽)

 

 

*

 

 

살짝 변형된 형태로, 기울어진 평면 위에 놓인 배, 복숭아, 사과 및 양파, 화병, 그릇과 병은 마치 동화 속 사물처럼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하게 지진이 발생하기 직전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마치 이들이 최후의 사물인 것 같다.(76~77쪽)

 

 

*

 

 

세잔의 작품은 그러므로 메시지인가? 내게는 제안으로 보인다.(루드비히 홀은 반 고흐가 그린 얼굴들을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라고 했고 세잔의 얼굴들은 "오직 그림으로만 그릴 수 있다"라고 했다.) 그들은 내게 무엇을 제안하는가? 그들이 뭔가를 제안하듯이 보인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비밀이다.(77쪽)

 

 

*

 

 

이곳에서 두 명의 마을 노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사람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산단 말인가?" 나를 가리킨 말은 아니었지만,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나 또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사물 역시 지속적으로 현실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일생동안 스스로를 믿는 존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어린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래도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그림들의 그림은 있지 않았던가?(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