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부엉이에게 울음을」(『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수록)

시월의숲 2022. 8. 7. 13:28

두 번째 이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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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누군가, 배우와도 외국과도 관련이 없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타자기에 쳐 넣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임의의 글자와도 같은 것.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서 더욱 매료시키는 것.(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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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며 결정적인 어휘는 다락방이나 표류나 먼지가 아니라 <홀로>이다. 나는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졸음과 잠 사이의 불명확한 시간, 현기증과 침울함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기찻길에 항상 마음이 끌렸다. 그것은 모두 <홀로>의 세계였기 때문이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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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그리고 깊은 밤중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럴 때 내 손에는, 잠이 들기 전까지 읽었던 것과는 다른 책이 들려 있기도 했다. 그것은 스스로 나를 찾아온 내 꿈의 책이었다. 그것이 여인의 젖처럼 요람처럼 나를 키웠다. 나는 눈꺼풀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우연의 의도에 의해 내 손 안에서 펼쳐져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페이지의 구절들을 읽었다. 다락방의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창을 열면 불탄 벽돌과 젖은 신문지의 냄새가 났다. 밤의 냄새가 났다. 꽃이파리와 고양이의 냄새가 났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책은 내 손에서 미끄러졌고, 우주의 머나먼 다락방으로 회귀하듯이 책더미 사이로 묻혀버렸다. 그래서 나는 예를 들자면

  밤은

  부엉이에게 울음을

  늑대에게 아기를 준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 구절을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알지 못한다.(119~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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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은 나의 유모였고 난파선이었다. 다락방은 최초의 말이었다. 내게로 찾아온 말이자 나로부터 발생하는 최초의 말이기도 했다. 다락방은 소리였고 감촉이었고 냄새였으며 불안이자 쾌락의 느낌 그 자체, 앞으로 전 생애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끼게 될 모든 것이었다. 다락방은 점치는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를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내 시간은 어느 순간에 과거와 미래의 길로 갈라진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갖는다. 그들은 점점 많아진다. 마치 내가 읽는 책처럼. 나는 이 얼굴이고 동시에 저 얼굴이다. 그들은 서로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다. 운명은 하나이자 동시에 천 개다.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운명을 갖지는 못하리라. 그 누구도 단 하나의 얼굴을 갖지는 못하리라. 오늘은 어제인 동시에 내일이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속삭이고 있다.(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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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단지 이 이야기를,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 사이의 모든 것을, 우연히 펼쳐든 페이지에서 발견하고 읽은 후 무의식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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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누구도 나를 찾지 않는 지루하고 무더운 한낮 내내, 나는 오직 다락방에서 살았다. 앞집에 세든 젊은 여교사는 한가로운 주말 오전 종종 풍금의 페달을 삐걱삐걱 밟았고 아래층에서는 식모가 환한 햇빛 아래서 이불을 털었다. 열린 주방 창으로는 점심으로 먹을 국수 삶는 김이 피어올랐다. 곰팡이 빛으로 푸르게 그늘진 뒷마당에서 닭들이 꾸르륵대며 알을 품었다. 그리고 때로는 밤에도, 마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깊은 밤 불편듯 잠에서 깨었다. 기억해 내지 못하는 꿈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어린아이용 침대에서 가만히 내려온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바닥에 깔아둔 낡은 담요 사이로 기어들어가 몸을 움츠리고 다시 잠들었다. 하루가 왔고, 그리고 하루가 갔다. 나는 그렇게 자랐다. 골목길의 희미한 악취와 또래 아이들의 소음이 자욱한 안개로 고여있는 기나긴 한낮과 흰 부엉이의 밤 내내, 나는 그렇게 자랐다. 오직 다락방에서. 오직 홀로.(121~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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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작 자신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것을 슬쩍 뒤로 감추면서 겉으로만 불쌍하게 우는소리를 늘어놓는 하수인의 재능이 있다. 나는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을 지긋지긋한 존재로 경멸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예와 주인들 간의 이중 첩자이기 때문이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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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거리는 글자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나는 어쩌면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지적인 훈련이나 재능도 없이, 그 어떤 준비나 지식도 없이, 오직 부엉이의 울음을, 오직 밤의 징후를, 해독할 수 없는 다락방의 문자로 옮겨 쓰는, 개연성 없는 문장들 사이로, 서툴게 말더듬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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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꿈을 꾼 모양이군.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꿈이라니. 그건 밤의 꿈인가, 아니면 낮의 꿈인가?"

"자면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문득 꿈처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구요."(161~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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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 세상은 곧 글이야. 글이야말로 우리 삶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해······ 글이 없는 삶은 내용이 없는 사건에 지나지 않지······ 당장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책을 읽는 자들은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읽도록 해.(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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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내가 믿지 않는 신에게 내가 갖지 않은 영혼을 당장 내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었어요.(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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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다는 행위에 매료된다. 나는 낡은 종이와 활자의 냄새를 깊이 들이마신다. 나는 잃어버린 어떤 내용을 되찾은 듯하다. 내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그 내용에 나는 매료된다. 그것이 나를 만든다. 내 표정을 만든다.(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