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21.

시월의숲 2022. 7. 14. 20:24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중에서

 

 

*

 

 

오늘도 암스테르담엔 노란 햇빛 비치고 플로렌스에선 그리운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 <고요한 사막의 나라> 중에서

 

 

*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중에서

 

 

*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의 별에 잠시 걸터앉아

흘러온 길과 흘러갈 길을 바라본다.

 

- <시간 위에 몸 띄우고> 중에서

 

 

*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 <여성에 관하여> 중에서

 

 

*

 

 

나는 쓰레기통 속에 고요히 처박혀,

그래도 밤은 아름다워,

이 지상의 누더기인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아름다워라고 말한다.

 

- <S를 위하여> 중에서

 

 

*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 < 20년 후에, 지芝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