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
그러고 보니 시월.
시월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의 다른 이름. '시월'은 '숲'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 내가 좋아하는 '시월'과 내가 좋아하는 '숲'이라는 단어를 묶어 '시월의 숲'이라고 천천히 발음해 본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그리하여, 끝내 나는 기형도의 10월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 기형도, 「10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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