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무언의 대화

시월의숲 2022. 9. 23. 00:09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선물 받았던, 내 키보다 컸던 해피트리가 어느 순간 시들시들하더니 얼마 전에 마지막 잎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주에 한 번씩 물도 주고, 영양제도 사다가 꽂아주고 했는데도 결국은. 줄기만 남은 해피트리를 어쩌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냥 그 자리에 두고 있다. 한동안 마음이 헛헛했다. 한 때는 잎도 더 많아지고 잘 자라는가 싶었는데, 계절이 바뀔 때면 후드득 떨어지던 잎을 보면서 내 마음도 후드득 떨어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잘 견뎠는데 말이다.

오늘 화장실에 가다가 사무실 건물 로비에 놓여 있는 해피트리를 보았는데, 처음 볼 때보다 잎이 무성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새롭게 자라난 잎은 이전에 있던 잎에 비해 윤기와 색깔이 확연히 달랐다. 그 푸릇푸릇한 잎들은 생생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해피트리 앞에 서서 새로 돋아난 잎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경이로움에 찬탄하다가 내 집에서 수명을 다한 해피트리가 생각나 이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지나가던 동료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화초 관리하시는 분 같아요. 무얼 그리 열심히 보고 있어요?"

"아, 우리 집에도 이것과 똑같은 화초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여기 로비에 있는 건 이렇게 싱싱하게 잘 자라는데, 우리 집에 있던 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관심과 애정의 문제가 아닐까요? 여기 로비에 있는 건 어쨌거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보거나 만질 텐데, 집에 있는 건 아무래도 그런 관심이 덜하잖아요. 집에 누군가 있어서 자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고. 왜, 식물도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산다잖아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나도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관심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주중에는 일 때문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자기 바쁘고, 주말에 겨우 들여다보곤 하지만, 이 삼 주에 한 번 물을 주는 거 외에 살뜰히 살피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집에 화초를 키우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냉담한 유형에 속할지도 모른다.

오래전 할머니와 살 때는 온 집안에 화초로 가득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는 늘 화초와 대화를 하셨던 것 같다. 조용히 물을 주고 세심하게 살피고, 벌레를 잡아주고, 지지대를 꽂아 가지를 고정하고, 영양제를 주고, 잎을 닦아주는 등의 행위가 식물들과 나누는 무언의 대화였던 것이다. 그런 관심과 애정이 화초들을 살게 한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를 통해 보았으면서도 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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