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에 대해서

시월의숲 2022. 11. 4. 22:03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 진은영, '시인의 말' 중에서(『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수록)


*
시집의 맨 처음 실려 있는 시인의 말에 눈길이 머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에 대해서. 나는 늘 내 외로움밖에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것을 달래기 위해 애를 썼을 뿐, 내가 아닌 누군가를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그 차가운 인식이.

나는 언제나 희생을 강요당했고, 그래서 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해야만 했으며, 그래서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하고, 가장 힘들며, 가장 외롭고 고독하다고, 그래서 한없이 억울하다고 어린 시절의 나는 생각했었지. 결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중이병'스러운 피해의식 때문일까?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로 똘똘 뭉쳐진 어른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런데,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 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라니. 시집을 펼치자마자 내 앞에 당당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 문장들을 보고 있자니, 나는 그 '한 사람'이 늘 혼자였던 자기 자신이 아닐까 은근히 오독하고 싶어 진다. 모든 것을 반대로만 하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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