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나의힘

올랜도

시월의숲 2022. 11. 13. 20:00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과 함께 물 밑으로 사라졌다

나의 하느님, 전당포에 앉아 계신 인색한 하느님

얼마나 값을 쳐주시려고

이 많은 영혼을 당신 속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나요?

겨우 고관대작을 위한 은그릇 몇 개 내주실 작정이면서

 

올랜도, 나 올랜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지고서

 

올랜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 진은영, 「올랜도」 전문(『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수록,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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