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작지만 확실한 위로(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시월의숲 2022. 12. 17. 18:33

 

책이 읽히지 않는다고 투덜댄다.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독후감을 쓴 날짜를 들여다본다. 8월 30일.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핑계는 늘 일이다.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집에 오면 책 읽을 생각조차 할 수 없어서, 잠 자기 바빠서, 피곤해서 등등. 정신없이 바쁘면, 일 외에 다른 것들에 대한 열망 또한 커지곤 했는데, 그래서 없는 시간이나마 쪼개서 책을 읽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열망조차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쓴 약을 삼키듯 하나씩 읽어나가는 단편들은, 읽고 난 후 잠깐 동안만 내게 머물다 쉽게 날아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겨우, 소설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이 읽히지 않는 나날들 속에서 내가 겨우 붙잡고 있었던 책이 바로 윤성희의 『날마다 만우절』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 눈에 띄었을 뿐. 나는 이 책을 꽤 오랫동안 읽었지만, 깊게 읽지는 못한 것 같다. 그저 단편 하나를 읽고 오래 접어두었다가 문득 생각나면 책을 펼쳐 다음 단편을 읽었다. 새로운 단편을 읽을 때면 앞서 읽었던 단편의 내용이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읽었고, 그것을 잊었고, 또다시 읽을 뿐이었다. 그저 읽는다는 행위만이 내게 어떤 위안을 주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소설집이 한없이 가벼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연달아 쭉 읽을 수 있는 단편들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 소설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주인공이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내가 이 소설들을 쉽게 읽을 수 없었던 이유가 - 단순히 책이 읽히지 않는 요즘의 내 상태 때문만은 아닌 -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나아가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인 소설, 그래서 모두가 중요하고, 모두가 위로받아 마땅한 그런 소설. 그래서 모두를 어루만지는 소설. 끝끝내 어루만지고야 마는 소설.

 

윤성희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조금씩 아프고 절망적이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내 예기치 않은 위로를 준다. 마치 농담처럼, 아파도 아프지만은 어떤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것이다. 이건 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이번 소설집을 읽고 그런 신기한 순간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은희경은 은희경식 농담이, 김연수는 김연수식 농담이, 정지돈은 정지돈식 농담이 있다면 윤성희는 윤성희식의 농담이 있다. 윤성희식의 농담은 때로 비현실적이다 느껴질 만큼 어리둥절한 상황에 우리들을 빠뜨리지만, 끝내 현실의 차가운 바닥을 직시하면서 한줄기 따스한 온기 쪽으로 몸을 내밀도록 만든다. 그것은 윤성희만의 특화된 농담(혹은 위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워서 감기에 걸리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리니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거리고. 며칠 후에 그 문장 아래에 누군가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음.'(215쪽, 윤성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중에서)

 

그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는 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큰 위로를 바라지 않는다. 작지만 확실한 위로가 우리에게 절실하다는 걸, 윤성희 소설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쉽게 날아가버리는 감정들 속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