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최열, 『권진규』, 마로니에북스, 2011.)

시월의숲 2023. 1. 9. 18:08

남자흉상(1967)
가사를 걸친 자소상(1970)
춘엽니(1960년대)
스카프를 맨 여인(1960년대 후반)

 

권진규가 아로새긴 숱한 인간흉상들은 모두 다르지만 같다. 남성과 여성을 분간할 수 없고, 속인과 승려를 가를 수 없으며, 환희와 비참도 나눌 수 없는 인간이다. 현실을 지워버린 채 꿈으로 가득 채운 그릇일 뿐, 거기엔 눈물도 피도 메마른 듯 그대로 잠들어버린 영혼의 선율만 흐른다.

 

- 최열, 『권진규』 중에서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에, 저 책표지로 쓰인 흉상의 이미지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저 책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고만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사서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결국 그것을 읽었다. 나는 그의 전시회를 가본 적이 없고, 가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의 작품들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특히 사람 흉상의 테라코타-에 이끌렸다. 그 이끌림에 대해서 당시 나는 이렇게 썼었다.

 

"화면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그 흉상의 미묘한 분위기에 나는 사로잡혔다. 그래서 나는 권진규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단지 모니터를 통해 본 조각 작품의 작은 이미지 하나만으로 그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배수아가 「영국식 뒷마당」에서 '내 안의 깜깜한 고대동굴에 최초의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고, 그을음과 재, 동물의 기름과 붉은 흙으로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를 남겼다'라고 쓴 것과 마찬가지로, 꼭 그렇게."

 

다소 흥분된 어조로 쓰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특히 책표지에 실린 <가사를 걸친 자소상>에 나는 사로잡혔다. 전시회를 간 것이 아니었으니 실제로 그의 작품들을 본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서 그의 작품들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책은, 다소 고양된 어조로, 칭송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어조로 권진규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는 과소평가되었으며, 제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뉘앙스가 책의 전편에 흘러넘쳤다. 때로 책의 어떤 부분은 작가의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삶을 긍정하고 그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데 나 역시 공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흉상이 나를 사로잡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개괄적이나마(단편적으로나마) 일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물론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다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읽고 그를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역사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다 거쳐온 세대라는 것, 하지만 모순적이고도 아픈 현실과는 다소 떨어져 관조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열렬한 리얼리스트들은 그의 삶이 마땅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는 늘 현장에 있기보다는 피해있기를 택했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을 폄하할 수 있을까? 예술이란 여러 양상이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저항의 예술가는 못될지라도(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법은 또 어디 있는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그리하여 그것을 표현해 내는)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테라코타 앞에서, 인간의 흉상 앞에서, 그의 자소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기란 힘든 일이 아닐까? 내가 실제로 그것을 보지도 않고, 그를 더 알고 싶어서 그의 작품사진들이 담긴 책을 사고, 그의 삶에 대해서 읽게 될 줄 나조차 알지 못했으므로. 

 

이 모든 것들이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모른다. 나는 그저 그가 남긴 조각들을 볼 뿐이다. 그것도 실제가 아닌 이미지로써. 그러므로 내가 하는 말들은 다 무용하거나, 진실이 아니거나, 상상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그것들을 실제로 볼 수 있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때로 어떤 종류의 예감은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할테지만.

 

 

*

인간 속에는 심지가 있는가
상처가 있는가?
···
속이 빈 테라코타가
인간의 속에 대해 속의 말을 한다.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

- 황동규, 「권진규의 테라코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