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없는

시월의숲 2023. 3. 26. 21:51

 
'쉼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 있다. 이 말은 당신 자신에게도 적용되므로 당신은 늘 부재중이며, 다른 사람들, 친구들에게도 그렇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으로 보면 당신은 '다른 어딘가'에 있기에 어딘가에는 '부재중'이지만, 또한 어딘가에는 늘 '있기' 때문인데, 요컨대 당신 자신에게 말이다.'
 
'당신은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없다. 그것이 내가 모로코를 두 번째로 여행한 방식이다.'(세스 노터봄, 『유목민 호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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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이 여행하는 자가 있다. 그는 언제나 다른 어딘가에 있다. 그는 늘 부재중이지만 또한 어딘가에는 늘 있는데, 바로 그 자신에게 그렇다. 그러니까 그는 쉼 없이,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도 자신 안에는 늘 있으므로 그는 '타인이 관할하는 세계를 홀로 여행'하는 여행자가 된다. 그가 쓴 여행기(라고 할 수도 있고 그가 읽은 것들에 대한 사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는 그리하여 그 자신만의(당연한 일이지만) 글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막 마치고 온 상태였고, 생애 첫 유럽 여행에 대한 낯섦과 이질적인 감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으므로 내가 다음 책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생각하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여행을 다녀오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물론 나는 책에 나온 장소에 가지는 않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장시간 비행을 했고, 유럽이라는,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곳을 보고 왔으므로. '그렇지 않은 나'와 '그것을 경험한 나'는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아직도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기분을 종종 느꼈다. 나는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눈부신 햇살과 서늘한 그늘, 사이프러스 나무와 광활한 올리브 나무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눈부신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던 현지인들 사이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그곳에 남겨두고 온 내 일부를 느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함으로.
 
이 책에는 다양한 여행지가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아프리카의 감비아와 모로코, 이란의 이스파한이라는 곳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로(내가 아는 나라는 어디인가?), 그 무지로 인해 그곳은 이상하게 매력적인 곳이 된다. 물론 실제로 가게 된다면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일단 작가의 눈으로 본 그곳은 이상하리만치 낯설고 수수께끼 같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생각할 거리나 사유의 폭 또한 많아지고 넓어지며 끝내 깊어지는 그런 장소들. 나는 그렇게 작가와 함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들을 여행했다. 그것은 실제 내가 다녀온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에 이어지는 또 다른 방식의 여행이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서 쓰고자 했던 최초의 생각이 결국엔 내가 다녀온 여행에 대한 감상문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이 책을 말한다. '당신은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없다'는 그 한 문장만이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