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계획이 없이 춘천을 가게 되었다.
그곳은 내 고모가 사는 곳이자 고모의 딸, 그러니까 내 사촌동생의 집이기도 했다. 나는 사촌동생과 함께 사촌동생의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춘천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사촌동생의 남자친구는 나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었는데, 인상이 순해 보였다. 밤이었고, 우리들은 집 근처 작은 술집에 가서 육회 한 접시와 제육을 곁들인 구운 두부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술을 마신 나는 점차 말이 많아졌다. 어느 순간 나 혼자만 떠들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우리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뭐 하지? 집에 도착하자 고모가 나를 보며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 하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춘천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즉흥적으로 왔던 것이다. 춘천에 뭐가 있지? 나는 고민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곳이 없었고 가보고 싶은 곳도 없었다. 이미 이전에 몇 차례 춘천에 다녀갔으므로, 유명하다는 곳은 꽤 가 보았던 것이다. 뭐 꼭 어디를 가야 하나, 싶은 마음도 들었는데, 사촌동생이 갑자기, 책방에 가는 건 어때? 하고 물었다. 책방? 그래, 책방!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으며, 책을 살 수도 있는 그런 장소 말이야. 나와 고모는 서로 눈빛을 반짝이며 그래, 좋다, 책방! 하고 소리쳤다.
그곳은 춘천 시청 근처에 있는 이층 건물에 위치한 작은 북카페였다. 내가 생각했던, 책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그런 책방은 아니었고, 좀 더 카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류의 신간들이 꽤 진열되어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마실 차를 주문하고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구경했다. 거기엔 내가 산 책들은 물론 내가 사고 싶은 책들이 꽤 있었다. 책들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처음 보는 책인데 저자가 배수아였던 것이다. 아니, 내가 모르는 배수아의 책이 있었던가? 나는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더 들여다보았다. 『작별들 순간들』이란 제목의 산문집이었다.
휘둥그레진 눈과 다물지 못하는 입. 그 순간 나를 둘러싼 배경과 소리는 모두 사라졌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와 책뿐.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책장을 넘겼다.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아, 이 책은 언젠가 작가가 인터넷 문학 사이트에 연재하던 글이로구나. 그 글들이 책으로 나온 거로구나. 연재 당시 제목은 『순간들 기록 없이』였다. 그래, 제목이 바뀌어서 내가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거로구나. 나는 이 책을 기다려왔구나. 그렇게, 하염없이. 하지만 지금 내 앞에, 내 손에,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구나. 오직 한 권의 책으로.
내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고모가 와서 물었다.
"무슨 책이야?"
"내가 언제부터인가 남모르게 원했던 책이야."
나는 그 책을 고모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심지어 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이메일로 알림을 받아보는 서비스까지 신청해 놓은 상태였는데."
하지만 메일은 오지 않았다. 어떤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서비스 기간이 지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비스 만료 기간이 다가오면 그전에 기간을 연장하겠냐는 이메일이 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고모는 책을 살펴보더니 자신이 선물로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는 자신의 집에 놀러 왔으니 이 정도 선물은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잘 읽겠다고 말했다. 정말이지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고모가 정말 고마웠고, 그 책을 정말 잘 읽을 것이었다.
책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특별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급기야 나는 책 속 프롤로그의 한 구절처럼,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하여 나는 기꺼이 나를 그 순간들(책) 속으로 밀어 넣을 것임을, 아니, 그 순간들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온몸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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