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나는 글과 함께 있었다.(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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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가방은 그 자체로 작은 도서관이다. 명목상으로는 여행중에 읽게 될 책들, 하지만 대부분은 읽는다는 직접적인 필요보다는 여행지인 장소에 어울린다고, 그러므로 반드시 동행해야 한다고 느끼는 책들이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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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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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집에는 놀랍게도 실내가 아니라 집에 딸린 작은 호숫가에 나무판자로 간이 테라스를 만들고 거기에 책상과 벤치를 고정해놓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그 자리에서 글을 썼고, 그것이 그의 글쓰기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도 고향에 머물 때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 자리에서 한밤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글쓰기를 좋아한다. 여름에는 글을 쓰다가 호수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판자 테라스에서 그대로 잠들기도 한다고 했다. 안개가 짙은 어느날 그는 호숫가에 불을 피운 뒤 불붙은 장작 하나를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수면에 비치는 불의 그림자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썼다.(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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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라디오에서 누군가가 오스트리아 작가인 FM의 집을 묘사하는 말을 들었다. "그곳은 엄청난 혼돈이었죠. 원고와 책이 사방에 가득 쌓여 있었어요. 사실 그녀의 집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는데, 방문자들 누구도 피아노를 보지 못했을 정도랍니다······"(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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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베를린을 떠난다면.
···
은둔할 수 없다면, 집이 아니다. 은둔할 수 없다면, 여행이 아니다. 베를린은 내 인생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시작된 도시이다. 내가 그것과 비로소 만난 도시이다. 베를린은 그것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젠가 베를린을 떠날 수 있기를 남몰래 소망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베를린에 올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 베를린을 영영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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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의 외부에서 쓰는 작가들을 나는 좋아한다. FM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이다. FM이 끊임없이 거트루드 스타인을 읽듯이 나는 항상 FM을 읽는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린 편인데, FM을 읽을 때 가장 느려진다. 나는 FM의 글을 가장 느리게 읽고, 가장 빠르게 잊는다. FM의 문장은 형체가 없으므로 간직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FM의 글을 플롯이나 형식이 없이 파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분절되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실체이다. 내가 그녀의 책을 읽는 방식은 물리적으로 읽거나 읽지 않는 모든 상태를 포함한다.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꾸만 같은 페이지를 되풀이해서 읽게 될까봐 무의식적으로 모든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하지만 읽은 것으로부터 빠르게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사로잡히면서. 어떤 문장은 읽기를 통해 불현듯 무한대로 확장되었고, 마치 거대한 날개에 실린 듯, 나는 읽는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심지어 망각하는 읽기를 계속한다. 어휘들의 래디컬한 배치. 혁명과 형이상학. 문장과 어휘 단위의 해체. 사랑의 해체. 만약 누군가 그녀의 글에 대해 묻는다면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사분의 삼만큼 미소를 지으며, "그것은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깨어나게 했어,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문장을 묻는 거라면,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라고 대답하리라.(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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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이 반복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읽은 페이지를, 문장과 단락을 되풀이해서 읽으며, 매번 그것을 다른 글로 받아들인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나는 그 책에 담긴 모든 것을 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위하여.(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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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아마도 나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그런데 살인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탐정도 나오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러나 뭔가를 찾는 사람들이 나오겠지. 그게 범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이 탐정이나 형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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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밀의 문 안쪽을 향해 스쳐지나가는 시선을 선호한다. 그런 순간의 언어적 확장을 선호한다. 우리에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긴 하루의 서막을 알리지만, 비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시선.(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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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정원은 잊게 만든다. 우리는 잊는다. 말과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의 근심과 고통을.(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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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오두막의 서가에는 『낙엽을 헤치며 걷는 사람』이라는 책이 있고, 자신은 그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그는 종종 단지 제목 때문에 책에 사로잡히고, 자신을 사로잡은 제목에 대해서 즐겨 이야기하곤 했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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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1월에 나는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비틀거린다, 라고 나는 대답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비틀거릴 뿐이라고. 나 자신이 쓴 모든 것에 걸려 넘어진다고. 그것은 밤의 숲에 드러난 뿌리다. 비명을 지르는 물닭이다. 나는 길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방향을 잃은 채 오직 낙엽을 헤치며 가는 중이다. 그것이 나의 글쓰기이다. 그러나 나는 내 공포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내 글은 아무도 모르게 달아나는 중이다. '글자 그대로 읽히는 것'으로부터.(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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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생의 나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들, 기차를 타고 불안하게 떠났던 여행, 수많은 편지, 기나긴 기다림, 망각한 이름들, 그 모두의 배경으로 물속의 수초처럼 흘러가는 연두색 풍경들. 나는 비밀스럽게 소스라친다. 나는 종종 어떤 감정의 절정 상태를 기억처럼 겪는데, 그것이 행복인지 아니면 정반대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행복한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느낌은 빠르게 휘발되어버리고, 나는 한 마리 티벳개처럼 그 자리에 홀로 남는다.(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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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문득 작별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삶의 시간 내내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비밀의 의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일생은 그것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다. 우리가 평화롭게 정원의 흙 위로 몸을 기울인 동안, 당신의 몸 위로 빛과 그늘이 어지럽게 얼룩지는 그 순간에도. 작별은 바로 지금, 우리의 내부―숲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궁극의 사건이었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몸을 구부리면서 당신의 목덜미 위를 느리게 기어간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집어올린다. 평화와 고요. 오직 빛과 호흡만이 있는 순간. 지금 당신이 불타고 있는 증거인가? 글쓰기는 작별이 저절로 발화되는 현장이다.(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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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클로드 시몽을 잠시 밀어두고 FM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FM을 잠시 밀어두고 뒤라스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뒤라스를 잠시 밀어두고 프랑시스 퐁주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프랑시스 퐁주를 잠시 밀어두고 한스 헨리 얀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한스 헬리 얀을 잠시 밀어두고 뒤라스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뒤라스의 다른 책을 잠시 밀어두고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잠시 밀어두고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볼프강 힐데스하이머를 잠시 밀어두고 클로드 시몽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있던 클로드 시몽을 잠시 밀어두고 FM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최근 몇 주 사이의 일이다. 이 목록과 순서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손을 뻗어 임의의 책 한 권을 집어들고, 표지나 작가의 이름은 확인하지 않은 채 한두 페이지를 읽기 시작하고, 그리고 다시 중단하며, 글을 쓰다가, 잠시 뒤에는 내가 읽던 책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또다른 책을 들고, 어디에선가 벤치에 앉아 이 책을 읽게 되리라는 기대로 설레며 산책을 나서기 때문이다.(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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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가장 고요한 환각이다. 그날 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자신에게 한국은, 그 무엇보다도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겨울날로 기억될 것이라고.(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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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실제로 아이가 보고 듣고 느낀 감각인지, 아니면 게르하르트 마이어가 썼듯이,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간직하고 있던 아미지와 생각이 현실 사물에 투영된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일생 동안 그것을 먹고 산다.(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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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행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은 긴 여운을 남기며 물위로 퍼져나갔다가 어느새 다시 되돌아오곤 했다. 상실을 겪거나 배반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수치스러울 때면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언젠가, 한 시간쯤 뒤에 혹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반드시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이다.(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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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으며, 거기서 입을 벌린 까마득한 심연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삶에는 가공할 만한 어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이는 그때 최초로 예감하게 되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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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말로 재가 되어버려야 한다면,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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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를 M***이라고 불러 달라고, 이제부터 나는 단지 이름뿐 아니라 목소리와 영혼 그리고 지나갔으며 앞으로 도래할 경험까지도 전부 M***이라고, 왜냐하면 나는 오래전부터 M***의 속삭임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스스로 그 목소리의 미디엄이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M***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실제 소리의 울림으로 그 존재를 완성해달라고, 그러니 나를 M***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나는 아름답거나 감동적이거나 스며들거나 지적이거나 훌륭하거나 압도적인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좋은 글이나 기억에 남는 글을 쓰기를 원하지 않으며 심지어 매혹적이거나 독특하거나 소름 끼치거나 아찔한 글도 아니라고, 문장 단위로 이루어지는 글을 쓰고 싶지 않으며, 개념과 철학으로 쓰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체와 통일과 조화의 글도 원하지 않는다고, 나는 연속성과 이야기의 문법을 피해 가기를 원하며, 구조와 플롯의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 무엇도, 심지어 내용이나 아름다움조차도 완성하거나 구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은 파편이었다, 단지 속삭임, 몸에서 울려나오는 숨과 같은 속삭임, 글을 해체하는 속삭임, 몸 없이 환하고 불완전한 사물과 같은, 하지만 속삭이는 사물인, 혹은 모순되고 파편적인 몸을 가진 소리, 하나의 물방울이 돌 위로 떨어질 때 비로소 풀려나는 광물의 속삭임, 동굴의 한숨인 속삭임, 먼 훗날 어느 날 네가 희고 커다란 다리 위에 서 있을 때, 저녁이고 햇살이 강물 위로 산산히 흩어지는 순간에, 너는 혼자인데, 문득 네 귀에, 네 입에, 네 몸안으로 동시에 덮쳐오는 파도처럼 사납게 속삭이는 여러 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느끼고, 놀란 얼굴을 돌려 방금 누군가 네 곁을 스쳐지나간 것은 아닌지 헛되이 확인하려 할 때, 멀리 다리 건너편, 석탄처럼 불그스름하게 이글거리는 인파 속으로 막 사라지는 M***의 뒷모습이 보였다고 믿는, 그런 글을 쓰기를 원한다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글을, 진실도 거짓도 아닌 글을, 일어났으면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관하여, 먼 훗날 어느 날의 흔 다리, 그곳을 지나갔을 M***을 시간을 앞서서 선취하는 글쓰기를 원한다고. 그러니 나는 이제 M***이여야 한다고, M***을 부르는 목소리가 없으면, M***도 없으므로, 우리를 앞서서 가버릴 것들, 뒤돌아보지 않을 것들, 우리가 가진 넝마를 다 팔아버린 이후에도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낡은 외투 안에서 이글거릴 것들을 쓰길 원한다고. 다리 저편의 M***처럼, 저녁빛 속에서 테두리가 일그러진 채 일렁이며 멀어져갈 몸 없는 그것을 쓰기 위하여 나는 몸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나를 이제.(133~135쪽)
*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썼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오직 기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140쪽)
*
과거 집들이 있던 곳은 거의 다 아파트로 변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아파트는 네가 말하는 어린 시절의 장소가 될 수 없노라고. 설사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할지라도, 어린 시절뿐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한 '장소'도 될 수 없노라고. 집들은 사라지거나 교체되고 지상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장소의 익명성에 익숙하다고. 내가 자라난 대도시의 삶은 마치 공동묘지의 집단 매장 구역과도 같다고. 개개인의 묘석도 없고 망자의 이름과 생몰연도는 따로 기록되지 않는다고.(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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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바닷가의 도시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졌으나 그 사살이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치유되지 못한다.(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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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질문. 만일 내가 지금 여기에 없는 거라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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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지 마, 하고 나는 나에게 말한다. 비유하지 말고 설명하지도 말고 성찰하려 들지도 마. 아무것도 누설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저절로 드러내 보이는 것들, 언어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현상성, 오직 그것들에만 집중해. 9월에는 놀라움이 있다. 여전히 빛 속에서 더이상 같은 빛이 아님을 느낀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사이-시간을 체험한다. 한 사람이 두 번 다시 같은 빛 속에 있지 못하리라.(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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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프리드는 말하기를, 자신은 강물에 관한 두 가지 인상 깊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그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번 몸을 담그지 못한다"이다. 어느 한 순간이 흘러가버림과 동시에 사람도 강물도 더이상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이야기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빈프리드는 대답했다. "강가에 계속 앉아 있으면 언젠가는 적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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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걸어서 여행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디든 걸어서 가고 싶다고. 그렇다면 설사 일생 동안 여행한다고 해도 나는 멀어질 수가 없으리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간혹 나를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건 매우 놀라운 사실인데, 나는 단 한 번도 멀어져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그렇다면 나는 항상 집에 있었던 것인가? 그건 매우 놀라운 사실인데,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걸어갈 수 있다면 기쁠 거라고 나는 말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알게 되는 그날, 나는 그렇게 해보고 싶노라고.(168~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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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아무런 의도 없이 내 입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나는 안개다"라고 즉시 대답했다.(176~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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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수용소로 끌려 간 사람들의 고통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끌려간 사람을 기다리는 자의 고통이 있다. 기다림의 고통을 책으로 쓴 자의 고통이 있다. 기다림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상태이다. 안개 속에 있는 그 무엇을 기다림. 아무도 안개 속을 보지 못한다. 기다림은 영혼을 느리게 죽인다. 마침내 한 사람이 돌아온 후, 돌아온 자나 기다린 자 모두, 세계의 종말과 인간성의 붕괴를 체험하고 목격한 자들 모두 더이상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과연 치유되었을까? 안개는 부유하듯 지상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들판을 뒤덮은 안개의 이불 위로 고통의 검은 이마가 떠가는 것이 보이다가 사라진다. 검은 자우어암퍼들이 달아나듯 멀어진다. 우리는 마치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한 번도 고통을 겪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고통을 잊었다. 그러다 햇빛이 비치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안개가 들판을 덮듯이 다시금 우리는 고통을 각성한다. 고통이 곧 우리의 대지였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거기서 피어난 서리이고 안개, 그리고 자우어암퍼들이다. 나는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단지 시야에서 잠시 보이지 않았을 뿐. 아아, 따뜻한 바닷가에서 『파도』를 읽는 여름은 두 번 다시 가능할 것인가. 만약 그런 여름이 다시 온다면, 우리는 마침내 평화가 왔다고 착각할 것이다. 단 한 번도 있지 않았던 평화,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았던 전쟁,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던 기다림.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암울함은 사실은 지속되는 한 권의 책과 같다고 나는 말했다. 신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은 햇살 환한 따뜻한 남쪽 바닷가에서 『고통』을 읽는 자이다. 그는 『고통』을 읽기를 멈출 수 없다. 그가 책을 읽는 한, 우리는 책에 적힌 자들이다. 끌려간 자이며 기다리는 자이다. (그렇다면 밀고자와 고문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개는 부유하듯 지상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검은 소의 이미가 안개 위로 솟구치듯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제 나는 안다. 우리는 책 속에 적힌 이름들이다. 책에 적힌 고통이 우리 자신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 작별하는 자이다.(186~188쪽)
*
오래전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내게 헤다야트의 소설 『눈먼 부엉이』를 건넸다. 자신은 이 책의 첫 부분을 읽자마자 곧 마치 (주인공이 피우는) 아편에 빨려들어가듯 매료되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더이상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그대로 책을 덮었다고 했다. 그는 종종 책과 관련한 마법을 경험하는데, 그런 책은 반드시 그것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 도래할 때까지 읽어버리지 않고 독서를 유예한다고 했다. 그가 마침내 『눈먼 부엉이』를 읽은 것은 그러부터 일 년 뒤 이란으로 여행을 갔을 때이다. 그는 마치, 『눈먼 부엉이』를 읽기 위해 이란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보였다. 그 책은 비밀과 같았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깊이 매혹당했고, 아무도 알지 못했기에.(206쪽)
*
벌거벗은 진실은 지루할 뿐이죠.(211쪽)
*
허공을 여행하는 일은 기이하다. 국경을 넘어야 하는 육지나 바다 여행과는 다르다. 산도 들판도 도시도 강물도 건너지 않으며 대신 구름의 초현실적인 형상들 위로 지나가는데, 마치 시간의 허물처럼 엷은 평면의 몸을 가진 그 형상들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이룬다.(211~212쪽)
*
그때 내가 무슨 일로 메를린에 머물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명확한 이유 없이 그냥 거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도시에서 내가 배운 단 하나의 문장은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였다.(212~213쪽)
*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밤 산책 중에 커튼이 쳐 있지 않은 환한 창들을 올려다보고, 우연히 그 집 주인의 서재가 눈에 들어오면, 그들이 어떤 책을 갖고 있는지 상상하기를 즐겼다. 그는 모르는 사람의 환하게 불 켜진 서재를, 상상력을 자극하는 먼 불빛의 방을 좋아했다.(215쪽)
*
세상의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아마 한 권의 책도 그렇지 않을까요.(237쪽)
*
봄부터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이 될 때까지, 그동안 내가 계속해서 무슨 글을 쓰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읽기에 대하여,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네가 읽은 책에 대한 글이냐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다시 물었다. 아니라도 대답했다. 나는 책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내 글에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라는 상상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글 속의 대화체를 위한 장치이며 '듣는 사람'으로 위장한 '말하는 사람'의 역할이고, 실질적으로는 '말을 암시하는 사람'이자 '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그는 마치 한 권의 책과 같고, 나는 반복해서 책을 읽는다고 쓸 뿐 한 권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고.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나에게 독서란 한 권의 책과 나란히 일어나는 동시성의 또다른 사건이지 책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이 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읽기에 대한 글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249~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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