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자신에게 한국은, 그 무엇보다도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겨울날로 기억될 것이라고.(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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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 누군가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산수유꽃이 피고 개나리가 막 피어나던 날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지만 명백히 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그런 계절. 점심시간의 짧은 드라이브가 아쉬웠기 때문일까? 누군가 이대로 바다 보러 가고 싶다고 외치듯 말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들은 그래! 나도! 라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곧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했던 우리들은 그저 말로만 호기롭게 가자고 외쳤을 뿐 아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우리들의 관계는 그렇게 누군가의 선동으로 움직일 만큼 견고하거나 감성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외침만으로도 우리들은 머릿속에 바다를 그렸으며, 봄 햇살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를 상상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경주도 좋은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경주를 떠올렸다. 나는 경주하면 까마귀가 생각난다고. 추수를 하고 난 들판에 까맣게 떼 지어 앉아 있던 수많은 까마귀의 무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순식간에 날아올라 파란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이리저리 출렁이던 까마귀 떼의 춤! 내게 경주는 까마귀의 도시로 기억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하필 까마귀예요? 졸지에 경주가 까마귀의 도시가 되었네요. 라며 내게 슬쩍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내가 한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취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다만 내게 핀잔 아닌 핀잔을 준 그가 조금 안타까웠다. 나는 정말 까마귀떼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순간 나를 사로잡은 매혹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좀 안타까웠을 뿐. 그는 알까? 마음을 사로잡는 순수한 매혹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사물을 둘러싼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났을 때 더욱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들의 기억은 그렇게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작별들 순간들』 속 베를린 서가의 주인처럼 한국은, 서울타워도, 63빌딩이나 롯데타워, 남산이나 한강도 아닌, 인적 없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눈 속에서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책을 읽었던 겨울날로 기억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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