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베를린 서가의 주인

시월의숲 2023. 3. 4. 00:33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절반쯤은 실제의 인물이면서, 절반은 이 산문의 연극적인 즉흥성을 위해서 고안된 장치입니다. 또한, 그는 글과 문학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정원과 오두막의 사람, 농부와 사냥꾼의 언어로 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산문의 화자인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이면서 글의 영혼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정원이란 장소로 이끈 자이기도 합니다. 그와의 대화를 미리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자신도 다음 글에 무엇이 등장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채널예스 인터뷰 중에서

 

 

*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을 읽고 있으니, 내게도 '베를린 서가의 주인'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한국에 머물 때, 산책길 어느 벤치에 앉아 게르하르트 마이어의 『눈의 발라드』 마지막 부분을 끝까지 읽었다고 했다. '남아 있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슬픔이 그를 채웠다.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작별들 순간들』의 마지막 부분을 산책길 어느 벤치에 앉아 끝까지 읽으리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남아 있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슬픔이 나를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하고 싶지 않아 언젠가는 도래할 그 '작별들 순간들'을 영원히 유예하고만 싶어질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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