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글감 주제를 보았을 때 어쩌면 나는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도전과 성취 경험’이라니. 내겐 그 단어들이 아주 먼 곳에 존재하는 별처럼, 혹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이국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 난감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전이라는 말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내가 도전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무언가에 도전해 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리 도전적이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도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이런 말은 어떨까. (좀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하루하루 사는 것이 도전인 내게 성취라고 한다면 그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것 정도가 아닐까 하는. 하지만 이 말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루를 사는 것이 도전이라고 한다면, 그 하루가 엄청나게 도전적인 무언가로 점철되어 있거나, 삶이 너무나 팍팍하여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내 삶은 그리 비극적이지도, 그리 희극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앞에 있는 일을 할 뿐. 그것이 내 미미한 성취라고 한다면 성취일 터이고.
내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도전과 성취라는 단어의 광휘에 가려져, 내게도 분명히 존재했을 소소한 다짐과 실천들이 다만 보이지 않았을 뿐. 왜 아니겠는가.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느끼는 애정과 증오, 한심함과 봐줄 만함을 떠나) 나는 분명 크고 작은 도전들을 했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이루었고 대부분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내가 성취한 것들보다는 실패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한 인생인가? 글쎄, 실패한 것들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라 할 수 있는가? 실패했기 때문에, 그 실패한 것들로 인해서 가까스로 나라는 존재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글을 내가 이룬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 적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내가 한 도전과 성취의 경험을. 시간이 더 있고, 내가 계속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다면 조금은 적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내가 이룬 것보다 실패한 것이 더 많다는 사실 외에는. 그리하여 나는 내가 성취한 것들보다는 실패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외에는.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살고, 그 하루를 잊고, 또 다시 하루를 살 뿐이라는 것을. 내가 어느 독후감에서도 썼듯, 나는 책을 읽었고, 그것을 잊었으며, 또다시 읽을 뿐인 것처럼.
나는 언젠가 하루키의 소설에서 내가 한 말과 비슷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자신 앞에 놓인 하루를 그러모아서 그것을 살 뿐이라는 말. 그것을 어디서 읽었는지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맥락이 딱 맞는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하루키의 말로 이 이상한 글을 끝내려 한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죠." 아가씨는 사려 깊게 말했다. "세계 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 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또 착실히 고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해 보면 참 이상야릇하다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뭐,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외로 그런 게 정답일 수 있어요.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 해도.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 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도 모르겠어요."
- 무라카미 하루키, 「사랑하는 잠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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