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라면

시월의숲 2023. 11. 19. 00:15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111쪽,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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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의 하루키인가.

그는 그가 꾸준히 했던 마라톤만큼이나 책을 내고, 그 책들은 꾸준히 하루키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그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은 독자들은 대체로 '여전하다'는 평이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찬사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그래, 하루키는 하루키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여전히' 재밌고, 잘 읽히는 이야기꾼인 것이다. 

 

시간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그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전에 나왔던 소설집 『일인칭 단수』 때부터 감지되었던, 시간이랄까 사물이나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깊어지고 관조적이 되었다는 것이 겨우 내가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소설은 그가 젊은 시절 썼던 소설들의 화려함(?)이랄까 재기 발랄함은 줄어든 대신 하나의 현상을 오래도록 바라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시선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은 마치 그 소설의 속편인 듯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헌데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1980년 문예지에 발표한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이 소설의 원형이라고 하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드랜드』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1980년도에 나왔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모태로 하는 쌍둥이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소설에서 파생되었으나 분명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소설. 

 

어쨌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조용하고 잔잔한 호수(간혹 바람이 불어와 수면에 조그만 파문이 일 정도가 그 호수가 가진 변화의 전부 인)를 떠올렸다. 그만큼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친구를 잃고, 꿈을 읽어야만 하는 알 수 없는 도시에서 깨어나기도 하고, 그림자와 이별하는 등 여러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고독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옐로 서브머린 소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키 소설에는 인상적인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옐로 서브머린 소년이 그랬다. 이 소설에서 가장 고독한, 그러니까 가장 고독할 수밖에 없이 태어난 사람이 바로 그 소년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고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 소년 덕분에 주인공은 용기를 내 자신의 그림자와 다시 만날 수 있게(결국 만나지 않았을까?) 되었는데도.

 

그림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 둘은 모두 자신의 선택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의 결말은 긍정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슬펐던 것은 그렇듯 고독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소년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갔으니, 그리고 그것이 그가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살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르니, 내 슬픔은 이쯤에서 거둬야겠지만.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체와 그림자는 서로 분리할 수 없으나, 혹 분리된다 하더라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니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겠으나,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이상하고 잘못되었다 느낀다면 우리는 또 그림자를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자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면 그뿐인 것이다. 어렵고 알 수 없을지라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까. 소설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고야스 씨가 말한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452쪽)

그래,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