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진짜' 삶을 위하여(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시월의숲 2023. 12. 31. 21:41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

맨 첫 장에 실려 있는 저 문장을 읽고 예감했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후 확실히 알았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고. '혼자 산다는 것'은 '진짜'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혼자임을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삭막할 것이지만, 결국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뿐이라는 걸. '혼자' 있는 시간의 양면성 혹은 모순성을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이 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읽게 되었다. 첫째로 최승자 시인이 번역했다는 사실과 두 번째로 '혼자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 때문에. 최승자 시인의 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번역한 책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내가 흠모해 마지않는 배수아의 소설뿐 아니라 그가 번역한 책들까지 열렬히 찾아 읽는 것과 같은 이유로. 최승자 시인의 번역서로는 이미 저 유명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가 있지 않던가. 이래저래 나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작가가 58세 때 쓴, 일 년간의 일기다. 일기 속에는 전원 속에서의 삶과 자신의 시에 대한, 인간들과의 관계에 대한, 여성이라는 자아에 대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얼핏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기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우연성 혹은 순간성 때문이었다.(이렇게밖에 표현할 길 없는 내 어휘들의 궁핍함이여!) 그러니까 이런 순간들. 

 

그날은 눈이 제법 온 날이었다. 나는 퇴근을 하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때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그리고 어느 날은, 누군가로 인해 심란하던 날이었다. 퇴근을 해도 계속 찜찜한 기분 때문에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이런 문장이 나왔다.

 

'나는 관계 속에 있음으로써 배우는 것이다.'

 

 또 어떤 날은, 빈센트 밀레이의 시집 『죽음의 엘레지』가 복간된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나는 그 시집을 최승자 시인이 번역했다는 것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메이 사튼의 책을 펼쳤는데 거기서 저자가 빈센트 밀레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빈센트 밀레이의 시 <계곡의 안개>를 떠올린다.

 

'인생은 기껏해야 도요새 울음보다 길지 않은 것을'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몇 번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이 책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마치 이 책은 내게 어떤 계시나 영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오래전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작가와 내가 마치 서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다음부터 나는 이 책을 마치 내가 작가 자신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읽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바라보는 자연을 바라보고, 그녀가 말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녀가 느끼는 감정들을 느꼈다. 정말 신비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경험을.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최승자 시인이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메이 사튼을 알게 되고, 빈센트 밀레이를 알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급기야 빈센트 밀레이의 시집 『죽음의 엘레지』를 사게 되었으니. 아, 어쩌면 제목도 최승자 시인을 닮았는지!('죽음의 엘레지'라는 제목의 최승자 시인의 시가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들 중에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메이 사튼으로 돌아가서, 그가 남긴 말로 이 두서없는 글을 끝내려 한다.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혼자 있는 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지옥 같은 상태에 있다.(259쪽)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그는 분명 '진짜'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