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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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아니 대부분)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으며, 책의 무엇이 나를 이끈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살펴보다가 놀라기도 한다. 내가 언제 이런 책을 구입했지? 하면서. 그것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때론 새롭고 낯선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마치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 속 문장들처럼, 나는 그것을 읽고, 그것을 잊으며, 다시 읽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시인이 쓴 이 여행기를, 어쨌든 나는 읽었다. 이 책을 맨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이 책을 겨울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읽었다는 사실일 테지만, 사실 그조차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기억을 되살려보건대, 아마도 나는 이 책을 '베네치아'와 '겨울빛'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단어들의 어우러짐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시인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그것도 겨울에 지내기 위해 갔다니!
그는 러시아(?)의 시인답게 이렇게 말한다.
겨울은 나의 계절이었다.(13쪽)
그리고 이렇게도 말한다.
저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다.(34쪽)
그러고 보면 작가는 겨울이라는 본인의 계절에 방문한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어떤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여행기 혹은 베네치아에서의 일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작가 특유의 서늘하고 멜랑콜리하며 시니컬한 묘사가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의 이면에는 베네치아에 대한 애정이 존재하기에 그것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말했듯,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그는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어떤 얼굴과 대면한 것일까?
나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만약 내가 내 제국을 벗어난다면, 뱀장어가 발트해를 빠져나간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베네치아를 방문해, 지나가는 보트들이 일으킨 파도가 내 창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아무 저택의 일층에 방을 하나 빌리고, 축축한 돌바닥에서 내 담뱃불이 꺼져가는 동안 비가悲歌 두 편을 쓰고, 기침도 하고 술도 마시고, 돈이 떨어지면 기차를 타는 대신 작은 브라우닝 한 자루를 사서 베네치아에서 자연사로 죽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내 머리를 날려 버리는 것이라고.(52쪽)
이 문장들을 읽고 기억해 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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