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민음사, 2007.

시월의숲 2024. 3. 4. 22:17

어느 날, 공중 집회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당신은 젊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에는 지금의 당신 모습이 그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의 당신, 그 쭈그러진 얼굴이 젊었을 때의 당신 얼굴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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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 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 있었다. 봄도 없고, 봄소식도 없는 지구의 긴 열사 지대에 살고 있었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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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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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줄곧 원해 온 것은 글쓰기였고, 오직 그것만을 하고 싶다고. 그것만을.(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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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굳어 가는 생각. 그것은 무엇엔가 도달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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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품었던 사랑, 또 끔찍한 증오, 파산과 죽음이 뒤엉킨 우리 가족 공동의 이야기, 사랑과 증오의 편린들을 끌어안고 있는 그 공동의 이야기를 내가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의 아야기는 내 이해의 폭을 넘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육신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어서 나는 모태에서 막 떨어져 나온 갓난아이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이야기는 침묵이 시작되는 세계의 문턱에 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침묵뿐이고, 그것은 내 온 생애에 걸친 느릿한 작업이다. 나는 마귀 들린 아이들 앞에서, 그들과 똑같이 신비에 넋을 잃고 서 있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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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에게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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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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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그에게 내가 그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그는 좀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고선 말한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났을 때 이내 그는 내가 뜨거운 여자이고 앞으로 사랑의 행위를 즐기게 될 것이며, 그를 배신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모든 남자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그리고 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불행을 만드는 도구였을 뿐이라고 덧붙인다.(···)아무런 찌꺼기도 없어. 찌꺼기들은 뒤덮이고, 모든 것이 거센 물결, 욕망의 힘 속으로 흘러가는 거야.(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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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을 하든 사랑을 하지 않든, 항상 비참해.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밤이 오면 그런 감정은 사라질 거야." 나는 그에게 그 슬픔이 꼭 낮 동안의 정사 때문만이 아니라고,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나는 지금 내가 줄곧 기다려 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 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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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마음속 깊이 확신할 수 있는 곳은, 삭막하고, 끔찍하도록 엄격하고, 불법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우리 집뿐이다. 가장 궁극적인 확신, 즉 훗날 작가가 되리라는 확신을 되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뿐인 것이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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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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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그런 사실들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불멸성은 유한한 것이고, 불멸성도 죽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런 사건이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성의 존재를 품을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 조건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불멸성의 존재를 간파해 낼 수 있는데, 그것도 똑같은 조건에서, 즉 그들이 그럴 능력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서이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124~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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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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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1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