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최윤, 《회색 눈사람》, 문학동네, 2017.

시월의숲 2024. 4. 11. 22:15

어떤 구체적인 소속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서 왔는지, 가족은 있는지······ 마치 공중의 전선에 매달려 있다가 어느 날 앞에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사라져버리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12쪽, 「회색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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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올 파국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순간적인 방임인 양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질서에 게으르게 몸을 맡겨버리면서 사람들은 삶의 나침반을 바꾸어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한 선택이다.(18쪽, 「회색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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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은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55쪽, 「회색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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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어떤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흔적 없고 매끄러우며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애호가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염세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고함치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불행해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으며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호들갑스럽게 웃지도 않는 ······ 그는 살 뿐이며 되도록이면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려고 할 뿐이다.(139쪽, 「푸른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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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욕구가 있었을 때는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없었으며,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저기 보였을 때 그는 이미 욕구가 없어져버렸음을 알아차린다.(163쪽, 「푸른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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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이 있다. 처음 듣고 조금 좋아한다. 혹은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 음악도 있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어쩌다 한 소절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닌다. 그리고 이 곡은, 서서히, 하루를 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된다.(172쪽, 「푸른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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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마도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여전히 오래전처럼 여기 빈집에 앉아 네가 받아보지도 못할 글을 써야 하는지 잘 모를거야. 그렇지만 쓰는 일, 그건 벌써 사건의 시작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겠지.(173쪽, 「그 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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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가 하는 작은 행동이 저 대양 건너편에서 이루어내는 일을 아무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는 늘 언젠가 일어나고 있는 거야.(182쪽, 「그 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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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서른 살을 기념해 잊지 못할 풍경을 선물로 주지.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야. 그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너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야!(193쪽, 「그 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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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완전한 매혹의 무장해제 속에서 매혹이 지옥으로 변모한다는 것을 매번 새까맣게 잊는 걸까.(194쪽, 「그 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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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오래 걸리는, 결과를 확인하는 데 어쩌면 일생이 걸리는 실험들이 있는 거야. 그러고도 확인되지 않는 실험도 있겠지. 그러나 실험과 함께 이미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너는 아니?(204쪽 「그 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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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뻔뻔하게 계속되며, 꽃들은 부당하게 피어나고, 날씨는 잔인하게 맑은 오후.(293쪽,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