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W. G. 제발트, 《전원에 머문 날들》, 문학동네, 2021.

시월의숲 2024. 3. 18. 10:40

언제나 내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 문인들의 끔찍스러운 끈기다. 글쓰기라는 악덕은 너무나 고약해서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 이 악덕에 빠진 자들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여도, 심지어 켈러가 말했듯 나날이 바보천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고 싶다는 생각만큼 절박한 바람이 없는 때에도 그 악덕을 계속해서 실천한다.(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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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글쓰기를 별로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하지 않은 것은 아닌 방식으로 자신을 항상적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강박적인 행위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작가야말로 사유라는 병에 시달리는 주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불치의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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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프리드리히 페히트는 이 시절에 뫼리케의 다음과 같은 행동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이야기한다. 뫼리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일일이 특별한 노트나 메모지에 적곤 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 초고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자기 파자마 호주머니 속 깊숙이 떨구었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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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는 기술은 실제로 어지간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격의 유지를 위해서, 손쓸 새 없이 거세지는 시커먼 소란을 몰아내려는 시도이다. 오랜 시간 켈러는 이를 위해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왔다. 물론 그는 이런 노력이 결국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임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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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그늘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펼치는 페이지마다 더없이 다정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글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한 순수한 절망에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항상 같은 이야기를 쓰지만 절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며, 미세한 부분에서 예리함을 발휘하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지상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있지만 공중에서 주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리는 그런 작가, 읽는 도중에 벌써 해체되기 시작해 몇 시간 뒤에는 글 속의 하루살이 같은 인물과 사건, 사물들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해지는 산문을 쓰는 작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153~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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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저가 일종의 철두철미한 동화와 공감을 통해서 그 안에 영혼을 불어넣는 방식은 어쩌면, 가장 하찮은 것들에서 입증되는 감정이야말로 결국 가장 처절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발저는 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조금만 깊이 정신을 집중하면 겉보기에 전혀 흥미롭지 않아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전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닌 점들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재를 휙 하고 불면 일말의 저항도 없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재는 겸손하고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것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점은 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믿음으로 뭉쳐 있다는 점이다. 재보다 더 덧없고 연약하고 가련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재보다 더 유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재는 개성을 가질 줄 모르며, 원래의 나무로부터 의기소침이 의기양양과 떨어져 있는 거리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재가 있는 곳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재를 밟아보라. 그러면 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도 않으리라."(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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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공중을 여행하기 위해 로베르트 발저는 태어났다. 그는 언제나 그의 모든 산문에서 무거운 지상의 삶을 넘어 더 자유로운 왕국으로 사뿐히 날아 조용히 사라지려 한다.(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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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들을 이루는 재료와 같다. 우리의 시시한 삶은 잠으로 완성된다.(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