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창비, 2019.

시월의숲 2024. 5. 20. 21:54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모르지 나도.(45~46쪽, <재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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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55쪽, <재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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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90쪽,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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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우주의 원리에 관심이 많기는 했어요. 궁금하잖아요. 세상이 왜 이렇게 생겨 있는지, 나는 왜 이런 꼴인지, 이 크고 넓은 세상에 별은 또 얼마나 많으며 나란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지, 뭐 그런 생각.

―그렇죠. 인간은 하찮죠. 하찮기 그지없죠.

개중 가장 하찮은 게 그의 개똥철학 같기는 했지마. 그는 깊게 한숨을 쉰 후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없이 외로워져요.(104쪽,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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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169쪽,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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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 앞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저 사람도, 45킬로그램에 쉰아홉살의 그녀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180~181쪽, <우럭 한점 우주의 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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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248~249쪽, <대도시의 사랑법> 중에서)

 

 

 

 

사회에서 정상이라 말해지는 생애 주기 속으로 편입되지 못한 관계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끝내 슬픔으로만 남는 것일까.(318쪽, 강지희 해설, <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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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가깝기에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심리적 착취를, 출구 없는 증오를, 그러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의 무한회로를 반복하며 가족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가만히 바라본다.(323쪽, 강지희 해설, <멜랑콜리 퀴어 지리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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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내기 위해.(339쪽,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