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시월의숲 2024. 4. 21. 18:18

 

 
나는 오래전부터 90년대가 내 '현재'라는 이상한 시간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2024년을 살고 있지만, 90년대로 봤을 때는 미래이므로, 나는 지금 2024년이라는 미래를 살고 있다는 감각. 당시 어렸던 나는 90년대 이후의 내 삶에 대해서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현재는 90년대에 뿌리 박힌 채 그 이후의 삶은 그저 이후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은 현재의 삶에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지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세상에서 마치 유령처럼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것이다! 나는 내가 맞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나는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과거의 나는 어느 한순간 죽고 다른 누군가가 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그림자를 잃어버린 주인공처럼. 혹은 한강의 『흰』에 나오는, 혈육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처럼. 나는 내게 있어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있는,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일 뿐인가.
 
나는 이 생각을 최윤의 『회색 눈사람』이라는 소설집을 읽고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다. 이 소설은 90년대라는 시대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무언가 커다란 물결이 휩쓸고 간 뒤의 공허와 추억, 익명과 고독, 분열과 망연자실, 관조와 이해 같은 것들이 소설 전반에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것은 2024년인 지금의 눈으로 90년대를 바라보았을 때 느낌이지, 정작 당시에 나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그때 어렸고, 세상의 모순과 부대끼느라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만 보던 시기였으므로. 과거의 역사로부터 무엇이 남았고, 식어버린 열정이 갈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 당시 내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 어떤 소설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기가 늦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늦더라도 어떤 소설들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연이든 그렇지 않든.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이고도 외적인 충동이 미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떠돌다가 언젠가 그것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굉장히 심오한 척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내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온 시절이 90년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끔찍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지금의 한심한 내 삶에 핑계를 대고 싶은 것일까? 어쨌거나 그 시절이 나를 만들고 나는 지금 그 시절을 지나 '현재'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겠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분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런 것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