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동안 나는 『연인』을 다시 읽었다. 책표지는 장자크 아노의 필름 한 장면이었다. 속표지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반가운 마음에 취리히에 있는 R에게 편지를 썼고, 베를린의 책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당신이 번역한 『연인』을 찾아내서 읽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는 오래전 대학 시절에 읽었으므로 당연히 이 책을 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다시 읽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내가 삼십 년 전 모국어로 읽었던 당시에는 이 책이 내용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읽은 것은 다른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썼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중에서)
*
'삼십 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
『작별들 순간들』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한다. 아무런 인용부호가 없었기에 나는 '연인'이 실제로 작가의 옛 연인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작가가 베를린 집에 머물 때 발견한 뒤라스의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연인'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라는 책으로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로 인해 나 역시, 연인을 만났다. 수많은 작별들 순간들 속에서 연인을. 아무런 인용부호 없이.
작가는 뒤라스의 『연인』을 다시 읽었으며, '첫 페이지를 펼쳐든 순간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었노라고' 썼다. 그것을 읽고 뒤라스를 읽었기 때문일까? 뒤라스의 『연인』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배수아의 『부주의한 사랑』이나 『철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인』 특유의 느낌, 시점의 이동과 부유하는 듯한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낯선 이국의 느낌, 바스러질듯한 공허함 같은 것들이 배수아의 소설과 비슷하다고 느낀 것이다. 아, 그것은 거기에서 비롯되었구나! 나는 비밀의 안개로 둘러싸인 어떤 이의 시원(始原)을 스스로 발견한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곧이어 나는 어떤 영향 혹은 매혹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영국식 뒷마당>에서 썼듯이, '내 안의 깜깜한 고대동굴에 최초의 누군가 횃불을 들고 들어왔고, 그을음과 재, 동물의 기름과 붉은 흙으로 죽지 않는 화려한 벽화를 남'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느꼈기 때문에. 내가 그의 영향력 아래서 그가 쓰고 번역하거나 언급한 모든 글을 찾아서 읽고자 하는 것처럼.
뒤라스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가 배수아라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로 인해 뒤라스를 알게 되었으므로. 수많은 '작별들 순간들' 속에서 '연인'을 만났으므로. 내 드물고도 게으른 독서의 팔 할은 그의 영향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뒤라스를 읽은 것이 아니라 배수아라는 프리즘에 투영된 뒤라스를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계속 착각한다(착각은 일종의 희열을 동반한다). 뒤라스의 '연인' 속 저 문장은 분명 배수아라는 작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었을 거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대답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줄곧 원해 온 것은 글쓰기였고, 오직 그것만을 하고 싶다고. 그것만을.(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중에서)
'흔해빠진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0) | 2024.04.21 |
---|---|
당연하고도 힘차게, 쓸쓸한 자는 (0) | 2024.04.07 |
역사가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1) | 2024.03.02 |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0) | 2024.01.01 |
'진짜' 삶을 위하여(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0) | 2023.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