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5. 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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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때문에 멍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멍한 사람이었는지도.(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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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핑계 대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삶이란 어쩌면 핑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나는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내 삶에 핑계를 대고 싶은 걸까.(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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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루종일 빗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의를 입은 채였지만 비는 귀찮게 피부에 계속 와닿았다. 저녁에는 와인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마셨다. 비는 계속 내렸고, 매번 불렀던 대리기사는 갑자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비와 술에 절여지고 구겨진 기분이란 딱 이런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 하고 싶다는 뜻이겠다. 진정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은 끝끝내 해버리는 아이러니라니.(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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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나날들 속에서 배수아의 글이 몹시도 읽고 싶어졌다. <작별들 순간들>을 다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은 그의 새로운 글을 몹시도, 간절히! 오로지 그것만이 지금의 나를 치유할 수 있을 것만 같으니.(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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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 누구라고 했다. 이름이 익숙하긴 한데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동창회 모임을 하는데 나오라는 이야기였다. 밴드로 붙여 놓은 것처럼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다 모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나는 그와의 대화가 점차 두려워졌다. 다른 동창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설마 그럴 리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과거 속의 나와 굳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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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가 나온다. 제목은 모르겠다. 그의 음성은 뭐랄까… 약간의 허무함과 많은 양의 설렘이 묘하게 섞여 있는 거 같다.(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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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계획은 카센터에 차를 맡기고 수리가 끝날 때까지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거였는데,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붉은 글씨로 월요일 휴관이라는 팻말을 보고 얼마나 망연자실했는지. 차선책으로 찾아간 북카페는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두 번째 망연자실. 하지만 카페공화국답게 카페는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읽을 책이 없어서 세 번째 망연자실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휴대폰 배터리와 데이터를 열심히 쓰고 있다. 꼭 책이 없을 때만 왜 그리 책이 읽고 싶어 지는지. 차수리가 끝났으려나.(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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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거대한(혹은 협소한) 틀에 질려서 오히려 개별 작품에 대한 흥미를 떨어트리는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전집'이라는 것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과격한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흥미가 가는 것부터겠지만.(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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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날씨가 왜 이래',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입에 달고 다녔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정반대의 날씨였다. 어제는 출근길 담벼락 아래 제법 많은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있었는데, 오늘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지고 없었다. 다만 활짝 핀 겹벚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20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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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의 세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상.(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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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어떤 소설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기가 늦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늦더라도 어떤 소설들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리라. 우연이든 그렇지 않든. 그럴 수밖에 없는 내적이고도 외적인 충동이 미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떠돌다가 언젠가 그것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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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이도저도 아닌 것을 쓰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노래 같지 않은 노래를 부르고,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 누군가는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가수가 되고, 코미디언이 되고,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되고. 문득 내가 이도저도 아닌 사람으로 느껴진다면 고개를 들고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나 흥얼거리자.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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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아침의 공기는 선선하다. 이제 곧 사라지겠지만.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곧 사라질,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내 안에 담기라도 하듯이.(20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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