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4. 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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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나를 보는 사람마다 놀라면서,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라고 말한다. 나는, "글쎄요... 잠을 많이 못 자서 그런가..."라고 대답한다. 거울 속에는 내가 있지만 내가 아닌 것만 같다.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와 있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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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 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 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어디 슬픈 것이 인간의 몸뿐이겠니. 나는 모든 것이, 심지어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와 시원한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맺는 관계와 그에 파생되는 수많은 감정들,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존재들이 다 슬픔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저 근원에는.(2024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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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언제 오냐는 말은 할 필요가 없겠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제일 먼저 아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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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속 우리에 갇힌 동물들을 보는 일은 신기하고, 기이하며, 끝내 고통스럽다. 특히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들의 눈은 앞에 있는 나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과한 다른 것, 멀리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느낌은 늘 어떤 슬픔을 동반한다.(202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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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안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렸고, 화초에 물을 주었다. 창밖으로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없고 피곤한 날들. 어쨌거나 오늘은 토요일이다.(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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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늘어져 있지만 더욱 격하게 늘어지고 싶다. 저 고양이처럼. 고양이는 늘어짐의 미학을 완벽하게 몸소 구현할 수 있는 생명체다.(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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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영상에서 페소아의 얼굴이 인쇄된 책자(페소아의 책이 분명한)를 스치듯 보게 되었다. 외국의 어느 작은 책방이었다. 그러자 언젠가 내가 리스본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 지나친 책방이 생각났다. 같은 곳은 아니겠지만, 그곳이 아닐까 상상하게 되는.(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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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쓸데없는 말을 얼마나 많이 내뱉었던가.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타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나는 늘 두렵다.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의 영향을 하나하나 단속하기에는 내 사고의 폭이 너무나도 협소하지 않은가? 침묵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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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의 삶에 그다지 불만은 없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보고 싶은 영화들을 제 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저 먼 곳에서 들리는 소문 같다. 인근의 예술영화관도 있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고 싶은 영화는 하지 않는다.(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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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뭉술이라는 단어와 몇 번 마주치다. 가끔 어떤 단어들이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조용히 그 단어를 읊조려본다. 그러면 그 생경함은 더욱 배가된다.(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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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음료를 먹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주위는 조용한데 캔음료 안에서 타닥타닥 기포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조용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는 소리. 저 캔 속에서 작은 전쟁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캔을 들어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다시 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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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의 노란색보다는 연하지만 연두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란 빛깔의, 이파리인지 작은 꽃인지 알 수 없는, 하지만 산수유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그런 빛깔의 나무들을 지나쳤다. 봄이 점차 제 옷을 입고 있음을.(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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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묻지요 : 왜 울고 있니? 그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이유를 모르거든요.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노력을 하지요.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그 아이는 제일 좋아한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람들은 뭔가를 보지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의 눈 속에서 빛나는 바다를 본 것이지요.

 

- 마르그리트 뒤라스, 『얀 앙드레아 슈타이너』 (연인의 약속) 중에서

 

내가 원한 것도 이런 것이었을까? 내가 바라보는 바다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 속에서 빛나는 바다를, 나는 보고 싶었던 것일까?(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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