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5. 2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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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오월, 나는 코로나에 걸려 격리중이었구나. 격리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그때도 5월 5일이 입하였고 2024년인 올해도 5월 5일이 입하다. 격리도, 오월도, 입하도 이래저래 다 믿기지 않는다.

 

거리의 이팝나무는 올해도 눈부시고.(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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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막 다 읽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에 혀를 차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던 것은, 슬퍼서라기보다 오늘 유난히 많이 날리던 송홧가루가 때마침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202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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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고, 향기로 먼저 알게 되는 꽃이 있다. 전자의 대표로는 벚꽃을, 후자의 대표로는 아카시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밤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데 달콤한 향기의 급습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는 듯이.

 

과거에 내가 아카시아에 대해서 쓴 트윗이 있나 찾아보니, 어쩜 그렇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감정을, 비슷한 문장으로 표현을 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내 어휘의 궁핍함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말을 또 하고 싶다. '바야흐로 아카시아의 계절'이라고.(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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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보기 전까지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라지. 비가 와서 슬픈 아이들이 많을까 휴일이라 마냥 좋기만 한 아이들이 많을까? 나는 어떠했던가? 비 오는 날 마당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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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 삶이 무척 여유롭고, 살 만하며, 내 고민이라는 것은 한갓 여유로운 자의 투덜거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내 고민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지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불안의 서』의 발문을 쓴 김소연의 지적처럼 페소아가 지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능력'일까? 페소아가 말했듯 '우연이 던져놓은 돌멩이이며 모르는 목소리의 메아리이자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는 것이 삶이라면!(202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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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한 일이다. 어제 나는 문득 진은영의 시집을 꺼내 단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제목은 <그날 이후>. 나는 문득 허를 찔린 것 같았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글을 보게 될 줄이야. 4월 16일도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이미 세상에 없는 자의 입으로 말하는 시가 이렇게 아프고 슬플 일인가.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마치 내가 겪은 것처럼. 내가 그 바닷속, 캄캄한 공포를 감히 느껴보기라도 한 것처럼.(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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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기에 취하겠다.(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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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되기도 전에 주말이 사라져 버린 사건에 대하여. 배터리가 다 되어가는 몸으로 사라진 주말을 보내고 다음 주를 버텨야 하니 지금부터 배터리 보호 모드로 들어가야 하나. 어서 부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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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항상 책을 사고 나면 읽고 싶은 책이 생기는 거지? 산 책들을 언제 읽을지 기약도 없으면서. 그렇게 해서 산 책들이 책장 가득 넘치면서도.(202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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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가 새로 왔나. 아니, '새로' 온 것이 아니라 '이제서야' 온 것인가? 청개구리 삼신이 씌었나 보다. 뭐든 반대로 하고 싶다.(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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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감동한다. 실은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을 수도.(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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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무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멍하게 있고 싶어서 멍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어서 멍하게 있는 것이다.(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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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에 쓰고 남은 전으로 저녁을 때웠다. 마실 걸로 막걸리 생각이 났으나 없어서 화이트 와인으로 대신했다. 기름진 전과 상큼한 와인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내일이 휴일이라는 사실이! 혼자 즐기는 부처님 오시기 전날 밤.(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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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어찌 그리 열심히들 사시나요. 저는 만사 귀찮기만 합니다만. 책을 읽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유명하다는 식당에 가는 것도, 축제에 가는 것도 저에게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말입니다. 거짓말 보태서 수백 번의 결심 끝에 겨우겨우. 그것도 금방 식어버리는데 말입니다.

 

지금 나는 봄을 타고 있는 걸까요. 아니, 생각해 보면 모든 계절을 타는 걸지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매번 적응만 하다가 볼일을 다 보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늘 그렇듯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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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부터 편두통이 있었는데 점차 괜찮아지는 것 같더니, 아직까지도 미미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프다기보다 짜증이 나서 약을 하나 먹었다. 더 빨리 먹었어야 하는 걸까. 통증보다 짜증이 몸에 더 나쁠 것 같은데 말이지.(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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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차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나 비현실이어서 놀랐다. 그 파랑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그 하양은 또 어떻고. 점심 산책길의 그 빨강은! 강원 산지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지. 거짓말 같은 시간이다.(202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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