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8. 20. 14:50

*

며칠 전 S에게 "장마가 끝나서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조금 달라진 거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더니 S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저... 아직 8월이 남았는데요."라고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좀 급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8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20240802)

 

 

*

낮에 소나기가 지나가자 선물처럼 무지개가 떴다.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완벽한 무지개였다.(20240807)

 

 

*

오늘이 입추다. 여름이 한창인데 입추라고 하니 기분이 묘하다.(20240807)

 

 

*

꽃은 자기가 사 오겠노라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손수 꽃을 사 오겠다고 했다.

꽃은 자신이 직접 사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이 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러 가겠다고 말했다.

 

영화 <디 아워스>의 한 장면을 보고 있으니 문득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다. 같은 의미지만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꽃이 먼저냐 댈러웨이 부인이 먼저냐. 울프의 소설을 읽는 게 먼저겠지만. 아, 우선 꽃을 사볼까?(20240810)

 

 

*

책을 본격적으로 읽을 것도 아니면서, 읽지 않은 책을 꺼내 표지를 한 번 훑어본 후 첫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는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는다. 다른 책을 골라 첫 문장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그렇게 여러 책들의 첫 문장들만을 무심히 읽는다. 책들과 첫인사라도 하듯. 기약 없는.(20240812)

 

 

*

세상엔 정말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내일은 알 수 없다. 이 문장의 호응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내 상태가 지금 이상하기 때문이다.(20240812)

 

 

*

거의 방문자가 없는 내 블로그에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귀하의 훌륭한 블로그 글을 보고 서로 이웃 신청을 맺고자 합니다. 소중한 이웃 추가가 돼서 서로 블로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누군지 모르겠는 이 친절한 방문객이 내 글을 읽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나는 그저 방문해 주셔서 고맙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블로그 성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당신의 블로그가 성장하기를 기원한다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며 답글을 남겼지만, 아무래도 그 친절한 방문자는 두 번 다시 내 블로그에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또한 들었다.(20240813)

 

 

*

사무실을 나오니 물기 가득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온도는 여전히 높은데 바람인지 수분인지 모를 공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이건 무슨 심정일까. 갑자기 울컥해지는 건.

 

바람은 분명 내 피부에 와닿는데 나는 바람을 잡을 수 없다.(20240813)

 

 

*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연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묘하게 각색되는 과거, 격앙되는 목소리와 표정들, 미화되거나 자기중심화되는 이야기들. 관객은 다름 아닌 나 자신. 나는 내가 나를 속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울컥 솟아나는 피해의식과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억울함과 보상심리. 이건 단순히 애정결핍에서 오는 걸까 아님 하루키의 말처럼, 어딘가 손상된 채로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지금까지 온 탓인가.(20240818)

'입속의검은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들  (2) 2024.09.18
단상들  (3) 2024.09.05
단상들  (3) 2024.08.02
단상들  (2) 2024.07.16
단상들  (2) 2024.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