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의검은잎

단상들

시월의숲 2024. 9. 5. 22:06

*

건강검진 결과를 긴장하면서 받아 볼 나이가 되었나.(20240821)

 

 

*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강아지 두 마리가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강아지들에게 다가갔다. 아직 모든 것들이 마냥 신기한듯한 두 눈!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20240824)

 

 

*

요즘 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아니라 원래 세상은 미쳐 돌아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20240824)

 

 

*

오늘은 아버지의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 와닿지 않았다. 오늘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고리타분한 진리의 설파보다는 참신한 증오의 교감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따져본들 무슨 소용 있을까?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묵묵히 밥을 먹으며 오늘따라 식당의 김치가 맛있다는 말을 했다.(20240824)

 

 

*

영화나 볼까 싶어 넷플릭스에 들어가 영화 찾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저녁을 먹을까 싶어 배민에 들어가 메뉴 고르는데 시간을 다 보내고, 조금이라도 덜 더울 때 산책을 나갈까 싶어 기다리다가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다. 이런 걸 도대체 뭐라 불러야 할까?(20240825)

 

 

*

나 역시 오래전부터 사람을 이름이나 명칭으로 기억하기보다는 그들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 편이다. 이름보다 더 매혹적인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있다. 내가 나에게 기억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가 한 말에, 혹은 내가 쓴 말에 불과할 것이다. - 배수아, 오늘의 작가상 수상 소감 중에서

 

정말 그럴까. 내가 만약 내가 한 말, 혹은 내가 쓴 말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내가 나에게 기억되는 방식이라면, 나는 나를 영영 잊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것.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나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기억한다고.(20240827)

 

 

*

이 사진을 보니 오래전 내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유독 미술시간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물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과목 중에 유일하게 야외 수업을 했기 때문이었다. 갑갑한 교실을 벗어나 탁 트인 운동장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겐 무척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행위로 느껴졌다. 내가 그린 그림은 내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매번 나를 좌절시켰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 보다도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담긴 풍경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 얼마만인가,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그 설렘을 다시 떠올린 것이!(20240831)

 

 

*

올여름의 습기는 확실히 좀 과하다. 집안의 화분에서 노란 버섯이 여러 개 솟아나고, 선물 받은 화초들이 눈에 띄게 웃자란다. 숲에서 버섯을 보았다면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집안에서 버섯을 보니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20240831)

 

 

*

우연히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의 문장들을 읽는다. 화장실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의 메인 테마곡이 흘러나온다. 퇴근을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주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에 측은함이 묻어난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떤 예감의 징조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마음의 문제일까 아니면 주위 상황의 문제일까. 그러니까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20240831)

'입속의검은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들  (0) 2024.09.29
단상들  (2) 2024.09.18
단상들  (2) 2024.08.20
단상들  (3) 2024.08.02
단상들  (2) 2024.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