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중해서 독서를 할 생각이 없었고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려는 의도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조차 몰랐고 제목이나 저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저절로 나타나는 어떤 글의 파편과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을 뿐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을 원했다. 아무런 의도도 계획도 없이 조우한 페이지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소리 혹은 운명으로서, 짧은 순간 동안 지극히 무심히 읽고, 상처도 사랑도 없이, 그대로 지나쳐가기를 원했다는 의미이다. 마치 나이프로 성서를 가르듯이.(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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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것이 나를 본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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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지어 교류의 종말을, 특히 오직 편지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교류의 종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고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의 종말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내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그건 항상 나 자신이 무언가의 종말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는 탓이다. 나는 종말을 주시한다. 종말에 매달린다. 그럼으로써 종말에 참여한다. 종말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비밀의 혁명가일 것이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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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내 과녁이 아니다. 나는 그 무엇을 향해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종말을 앞당기거나 반대로 저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직 그것에 끌릴 뿐이다. 나는 열정 없이 끌린다. 행동 없이 사로잡힌다. 나는 종말의 기미에 민감하고, 그것을 본다. 나는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기꺼이 종말의 뒤를 따라 도시와 길 그리고 숲 언저리를 가로지른다. 그것이 내 여행이다. 그리고 언젠가 가능하다면, 나는 그것을 만지기를 원한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여전히 계속해서, 비록 자주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편지를 쓰거나 혹은 읽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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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모든 것, 너는 내 모든 것이야!"(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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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을 알고 싶지 않은 만큼이나 나를 알고 싶지 않다. 대신 심각한 이유 없이 누군가의 뺨을 산만하고도 고요하게 때리고 싶다. 내 뺨이라도 상관없다. 문제는 내가 폭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대상 없는 미소와 온화함을 가졌고 그것은 내 비밀스러운 자랑이다. 그러므로 눈에 띄지 않게 침을 뱉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구역질 나므로 나는 망설인다. 나는 구역질 나는 인간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속속들이 우아한 인간이 아닌 건 분명하다. 종종 나는 극단적일 만큼 야만적이고 조야하고 거칠지만 그것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러나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끄러워한다.(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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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생애 최초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내 편지의 첫 문장이다. "여행,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불가능입니다. 인간은 원래 한 그루의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의 본질은 선취하는 불가능이죠.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최초의 여행을 시작했다고, 어느 책에서 나는 읽었습니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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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를 아는 것은 나체를 아는 것보다 더욱 은밀하다. ··· 필체는 목소리만큼이나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일생 동안 은폐된다. 혹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알려진다. 필체는 나체가 사랑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이다. 은폐된 것을 사적으로 선언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필체는 나체가 그런 것처럼 적나라하고 외설적이기도 하다. 달아날 곳을 남겨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필체의 사적 선언은 항상 보호받지 못한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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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여행을, 내 작별을 멈추지 않는다.(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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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없다. 종종 나는 삶을 그렇게 느낀다. 다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감정이다. 그 안에서 나는 한 그루 나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나무였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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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거대한 두려움은 말해지지 않는 것 속에 있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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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잔인하다. 집은 추상적이다. 집은 평평한 지붕과 유리창과 화단과 흰 빨래로 이루어졌다. 집은 꿈이다. 집은 여기에 있으나 여기 없는 그 무엇이다.(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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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으로, 사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 속한다. 나는 잠재적인 현실을 실제로 산다. 나는 상상의 여행지에서 쓴 편지를 나 자신에게 부치고, 그러면 다음날 우체부가 그 편지를 가지고 나에게 온다.
하나의 얼굴이란 없다. 오직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포착된 하나의 표상이 있을 뿐이다. 얼굴이란 수많은 계보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나를 낯설어한다. 그것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얼굴은 나를 떠나고 싶을 것이다.(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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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편지는, 그것을 썼다는 내 기억을 점점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며 모호한 파도 너머로 흘러갔다. 어쩌면 나는 꿈-편지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꿈-편지는, 어린 시절 의사에게 건넸던 편지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내가 쓴 편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썼으나, 나는 내가 쓰는 것을 몰랐다. 아니 내가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채, 나는 썼다.(59~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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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나의 개에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내 혀와 손바닥에는 황금빛 꿀이 넘쳐흐른다.(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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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협박은 친밀함의 일종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공통점이 없는 것은 위협이 되지 못하므로.(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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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그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는 주저한다. 텅 비었지만 사람들의 자취가 너무 많고, 끊임없이 속삭임이 들려오지만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집은 징후의 사유지이다. 집은 우리가 아주 멀리 여행할 때 기차나 비행기의 창밖으로 언뜻 스쳐지나간 후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소름끼치는 어떤 풍경이다. 집은 그늘지고 벽은 이끼로 덮였으며, 바깥 담당은 낮으면서 초록이고 축축하다. 바람은 모든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며 어둡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복도가 있다. 벽장과 다락, 창고에는 소유자가 불명확한 오래된 물건들이 쌓여 있으며 표상들의 전시장과 사적 공간이라는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지배한다. 집은 익명의 밀도로 가득하다. 집은 속삭임으로 가득하다. 지금도 여전히 내 귀에 들려오는 바람 같은 속삭임들.(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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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해독되는 그 순간부터 내게는 낯섦의 기호였다. 나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나를 특정한 하나의 이름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거나, 혹은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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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좀 더 관대해져야 된다는 생각이다. 농부가 흙과 지렁이에게 관대하듯이, 유목민이 말의 배설물에 관대하듯이, 우리는 질병이나 고독에 관대해져야 한다. 그것으로 인한 불편에 관대해져야 된다. 우리, 도시에서 홀로, 그것도 오래 살아남게 될 이들을 위해서.(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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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숨은 지켜보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애정이 깃든 모든 행위를 오직 지켜본다고 표현했다. 악숨은 물끄러미 쳐다보지 않았다. 똑바로 응시하지도 않았으며 집중해서 관찰하지도 않았다. 악숨의 시선은 아무것도 겨냥하거나 목표하지 않았다. 악숨은 지켜보지 않으면서 지켜보는 법을 알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대상을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외면하면서 오직 간접적인 시선으로 유예하는 지켜보기, 결코 몰아 붙이지 않고, 사납게 굴지 않고, 겁주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닿지 않고, 심지어 한마디의 말도 없이, 소리도 기척도 없이 그렇게, 마치 죽은 티벳개의 머리가 우리를 지켜보듯이, 마치 햇빛 아래서 책 읽는 사람의 시선과 책 이외의 사물과의 관계처럼, 조용하면서도 산만한 무의지, 너를 - 생각하지않음이란 방식의 집중, 오직 가만히 비켜 서 있는 시선의 머나먼 공존, 그것이 악숨의 지켜보기였다. 아마도 악숨은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악숨은 실제로 자신이 나를 아주 오랫동안 오직 지켜보게 된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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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한다는 건 결국 실망한다는 거야. 이해도 실망도 사라진 자리에 형체 없는 물처럼 뜨거운 그리움이 차올랐어.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그날 이후, 이해도 실망도 없이, 오직 너무 많은 것들이 그리워졌다고.(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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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이것을 알았을까, 어느 날 우리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격렬하게도 아니고 미칠 듯한 증오도 아니고,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는 무관심보다는 약간만 더 진지한 그런 종류의 미움이라서, 그래서 도리어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이 감정, 그도 미리 알고 있었을까 ··· 그런데 놀라운 게 뭔지 알아? 정작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 원망과 미움 저 너머에서, 심지어 자연스러운 망각 다음에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야. 한 사람이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생명 있는 것들은 어느 날 필연적으로 죽지만, 아니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엇도 정말로 죽지는 않는데, 우리는 그것을 오직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서만 깨닫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죽음은 불가능해진다는 것.(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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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나는 무의식중에 내 귀에 울려온 그 메아리를 되풀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은 공명하는 돌의 동굴이야, 비로소 깨어난 돌의 울음이야, 너도 그런 동굴을 가졌는지? 너도 그런 목소리를 가졌는지? 이 목소리를, 들어봐,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숨이 멎을 만큼 놀라워라, 내 안에는 얼마나 아득한 공허가 있었던 걸까,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의 말이 묻혀 있었던 걸까, 나는 그의 무덤이었던 거야, 이 말을, 나를 통해서 말해지는 이것을, 너도 듣는지, 아주 멀고도 우묵한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이 속삭임을."(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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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다. 내 것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 것인 운명이 있음을. 나는 파국을 선취한다. 준비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언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순서가 좀 흐트러진다고 해도, 지금 봄과 9월이, 그리고 겨울의 눈보라가 한꺼번에 닥친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인가.(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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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J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그래, 어느 특정한 생각이 아니라 한없이 밀려오는 생각이란 형태를 가진 어떤 파동의 상태, 조각조각 난 파편들로 이루어진 연결되지 않는 속삭임, 그 파도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듯한, 어린 시절의 내게는 바닥을 모를 정도로 멀게만 느껴지던, 한 가지 문제를 집중해서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발생하는 낯설고 분절된 목소리에 스스로를 완전히 내맡겨버린, 오직 그 속삭임에 열중하는, 그래서 목소리가 자신을 싣고 가는 바로 그곳에 자신을 온전히 내려버리고, 그 밖의 일은 다 잊었거나,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해버린 표정.(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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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란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을 보는 나는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숭배는 긴 시간 지켜보는 추상적인 눈동자와도 같죠. 그런 눈동자로 나는 당신을 바라볼 것입니다. 나는 봅니다, 나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당신을 모르는 그런 방식으로(163~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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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어떤 말이 있다. 어쩌면 나는 그 말로부터 태어난 아이일 수도 있겠으나.(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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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편지만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내게는 있다. 마치 동굴 속 돌의 울음처럼 내 안의 무엇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돌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우리에게는 결핍된 기나긴 영속 때문이다.(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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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여행을 떠났고, 당신은 여행을 포기했군요. 그런데 왜 그랬지요? 당신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 대답은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말했다시피 나는 한 번도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건 아직 잘 모른답니다. 언젠가 내가 여행을 하게 될까요? 아마도 언젠가는 나도 여행을 하겠지만,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다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너무 많은 여행을 할 것 같진 않아요. 나는 여행을 휴식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한 종류로 여기기 때문일 거예요."(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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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의 어린 시절은 외로웠습니까? 하고 그가 문득 물었다. 고통도 있었나요?
잘 모르겠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어린 시절은 마치 잠과 같았어요.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모든 거울 속에서, 반투명한 유리창의 빛 속에서 보았답니다. 단지 그것이 잠고 같았을 뿐이죠.(182쪽)
*
청년의 이름은 악숨이라고 했는데, 당연히 본명은 아니고 당시 몇몇 젋은 여행자들이 의도적으로 선택하던 탈정체성의 한 방식으로, 서류상의 제도적 이름을 버리고 자신이 지나온 여행지의 지명 하나를 선택해서 스스로를 명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패밀리 네임은 없다.(221쪽)
*
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알려지지 않은 종교시설에서 자란 아이의 냄새가 나.(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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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봐요, 예를 들자면 당신이 어느 날 우연히 떠난 낯선 여행지의 미술관에 들어가고, 그곳 지하실의 특별 전시관에서 예상치 못하게 한구석에 조그맣게 걸린 내 그림을 마주치는데, 그게 바로 이제 앞으로 내가 그리게 될 당신의 초상화라고 상상해봐요, 하고 악숨은 썼다.(258쪽)
*
당신도 나도 서둘지 않아요. 우리는 아무것과도 경주하지 않습니다. 여름과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멀어져가고, 이윽고 봄조차 사라진 다음, 마침내 9월이 영영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수히 되풀이될 때까지도.(260~261쪽)
*
나는 하염없이 젊었고, 내가 눈을 들어 어둠을 보면 환한 고통이 불처럼 켜졌다.(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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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숨은 거의 매번 편지에서 집에 대하여 썼다. 집을 쓰는 행위는 그에게 특별했다. 그는 집에 대해 씀으로써 집을 찾아가는 사람이었으며, 그럼으로써 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공간에 거주한다는 의미의 집이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집 말이다. 악숨에게 집이란 영혼이 깃드는 궁극의 공간, 곧 추상적인 몸과 같다고 했다. 자신에게는 그런 몸이 필요하다고 했다.(269쪽)
*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발신인 없는 편지이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은 하나의 그림 앞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 바로 그것이다.(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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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편지는 고유한 자신의 길을 가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통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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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나기 전 일생 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고, 지나간 삶과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일지 단 한 번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노라고, 나는 스스로를 영원히 읽지 않을 책과 같이 느꼈고 단 한 번도 나이프로 나 자신을 펼쳐본 일이 없노라고, 그리하여 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346~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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