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버넌 리, 《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2022.

시월의숲 2024. 8. 22. 21:45

어쩔 수 없이 응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그저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대했는데, 알고 보니 상대가 다른 인간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면, 설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42쪽, 「유령 연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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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수께끼처럼 신비롭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기이한 존재는 현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과거의 괴팍한 열정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거지요. 눈동자에 서리는 멍한 표정, 맥락도 없이 떠오르는 아련한 미소가 이해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흡사 괴상한 집시 음악에 붙여진 가사 같았어요. 동시대의 여인들과 딴판으로 다르고, 아득하게 거리가 먼 이 여자는 자신을 과거의 어떤 여인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뭐랄까, 간질간질한 연애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 모든 걸 설명했어요.(43쪽, 「유령 연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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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모든 현학적이고 현대적인 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폭력과 배반의 세기에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129쪽, 「끈질긴 사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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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자만하는 남자라면 명줄이 길어서는 안 된다. 일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런 행복에 죽음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만이 그녀의 애인이 될 자격을 부여할 터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사랑하고 고통받고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133쪽, 「끈질긴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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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너무 일을 많이 해요." 그는 말했다. "청춘은 여흥을 즐기고 극장에 가고 한가로이 산책하고 '아모리', 연애를 해야만 한단 말이에요. 심각한 일은 머리가 다 빠지고 대머리가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144쪽, 「끈질긴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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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라니. 악의 화신, 멍청하고 사악한 목소리의 노예, 인간의 지성이 창조한 게 아니라 육신이 잉태한 악기의 연주자, 영혼을 움직이기는커녕 우리 본성의 찌꺼기만 휘젓는 인간들! 목소리가 무엇인가. 인류의 심연에 잠자는 다른 짐승들을 깨우는 짐승의 부름이 아닌가.(180~181쪽, 「사악한 목소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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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쾌락 속에는, 우리가 산비탈을 오르거나 해풍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순간의 그 기분 좋은 숨 막힘, 그와 비슷한 감각이 깔려 있지 않나? 달리 말해, 무엇이든 철저히 소유하려면 다른 것들을 아주 많이, '결핍'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포기하고 '비소유'해야만 한다.(233쪽)